독서노트 2020. 9. 12. 20:26

[현대인의 소외], 퇴니스와 마르크스에 기초한 소외 원인 분석과 극복방안

한줄 느낌: 

 

친구의 책장에서 아주 오래된 책을 발견했다. 바로 프리츠 파펜하임(Fritz Pappenheim, 1902-1964)이 1959년에 출간한 책 [현대인의 소외(The Alienation of modern man: An interpretation based on Marx and Tönnies)]다. 

이 책은 78년도에 문예출판사에서 황문수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는데, 친구가 가지고 있는 책은 79년 3판이었다. 속페이지는 누렇게 변색되었다. 책은 실로 묶어서 만들어졌는데 부분적으로 갈라져 있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무엇보다 책은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 읽기에 불편했다. 게다가 요즘은 보기 어려운 한자 제목. 물론 본문에는 한자가 괄호 속에 들어 있긴 했다. 아무튼 낯설다. 

혹시 최근에 가로쓰기로 재출간된 책은 없나 살펴보니까 89년에 가로쓰기로 다시 출간되었다. 

아무튼 세로쓰기 책을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보니, 읽을 만하다.

생각보다 내용이 흥미롭다. 현대인의 소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된 바 없고 더 심화되었다고 보여지니 만큼 이 책은 21세기에도 유효하다.

 

독일계 미국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프리츠 파펜하임(Fritz Pappenheim, 1902-1964)은 소외로 인한 개인의 고립, 타인에 대한 무관심, 인간성 상실, 비인간화의 비극에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기술문명, 정치, 사회구조에서 소외의 원인을 찾아보고 소외를 극복할 방법은 없는지 고민한다. 

 

특히 4장은 저자가 가장 중점을 둔 장으로 보이는데,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독일 철학자)와 페르디난트 퇴니스(Ferdinand  Tönnies, 1855-1936, 독일 사회학자)의 사상에 기초해 현대인의 소외를 들여다 본다. 칼 마르크스의 저서 중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rhe 1844)]와 페르디난트 퇴니스의 저서 중 [공동사회와 이익사회(Gemeinschaft und Gesellschaft)]를 이 기회에 한 번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책 도입부에 나오는 고야(Goya, 1746-1828)의 동판화 '이빨사냥'은 충격적이다.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의 이빨을 뽑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여자의 그림인데, 이빨에 마법적 힘이 있다는 미신적 믿음이 여자의 시체에 대한 공포를 견디게 해준다. 저자는 이 여자의 비인간적인 태도야말로 '소외'라고 본 것이다. 

 

노트-이어지는 생각>

(아주 어색한 번역을 부분적으로 손보았다.)

 

제 1장 현대의 분위기-인간소외의 자각

역사의 각 시대는 각기 특수한 하나의 관념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관념은 많은 변형과 위장과 대립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숨은 왕으로서 그 시대를 지배한다고 그(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 독일 사회학자이자 철학자)는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러한 중심 개념은 존재라는 관념이었고 중세에는이라는 관념, 르네상스 시대에는 자연이라는 관념, 17세기에는 자연 법칙이라는 관념이었다. 18세기를 통해 개인이 핵심적 주제가 되었고, 20세기에 이르러 이라는 관념이 무엇보다도 호소력을 갖고 우리들의 관점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지배하는 관념은 무엇일까? 

 

인간은 즉흥적이며, 근본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은 지금은 공동의 대의를 위한 헌신적이고 용감한 투사인가 하면, 잠시 후에는 비겁한 배반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은 짐승 같은 깡패인가 하면 내일은 온화하고 유익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변덕스럽다는 뜻인데...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듯하다가도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을 쉽게 만날 수 있으니까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의 자아는 자신의 특성으로부터 이탈하여 자신의 특성을 초월할 수 있고 그 환경의 외부적 조건들조차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로 한정할 수 없는 문화적 존재이기도 하다는 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한다.

생물학적 특징뿐만 아니라 환경적 요인 모두 인간은 초월하려한다는 것. 

 

실존주의자들의 경우, 실존은 모든 순간에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존재, 미래를 지향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 자신에 앞서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소외와 그 익명적인 존재 방식은 카프카에 의해 조직적이며 무서운 정확성을 갖고 묘사되었다.(...) [심판]과 [성]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은 완전히 비인격화되었고 단순한 가면으로 변했다. 이러한 주체성의 상실로 말미암아 그들은 철저한 익명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작자는 그들을 지칭하기 위해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알파벳의 문자를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상태를 상징한다.

카프카의 [성], [심판]은 20대시절 나를 매료시켰던 소설이다. 그 두 소설이 내게 준 공포와 전율은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더 컸던 것 같다. 특히 [심판]은 카프카의 최고의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시스템 속 개인의 무기력함, 숨막힘, 하찮음을 잘 표현했다. 다른 말로 '소외'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 2장 기술과 소외>

노동자들이 직면한 위험이 얼마나 심각했는가 하는 것은 영국과 독일에서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른 바 리본 직기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포했다는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란첼로티 신부가 1579년에 쓴 설명에 의하면, 단찌히 시장은 아주 정교한 방적 기계의 발명자를 비밀리에 처형했다. 

기계가 노동자의 일거리를 빼앗을 것을 우려해서 기계발명가를 처형했다는 이야기는 정말 충격적이다.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노동자의 처지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술, 기계 발명이 한계에 부닺친다면 그것은 돈 이외에는 없을 것 같다.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얽매어 꼼짝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는 스스로 방출한 힘에 깜짝 놀라면서도 이 힘을 지배할 수가 없어서 절망적으로 다음과 같이 외친 마술사의 제자처럼 되었다. 

재가 불러낸 정령들을 이제 나는 쫓아낼 수가 없구나.

20세기 중반에도 기술, 기계 발전을 인간이 더는 제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판단했지만 21세기에도 그 판단은 여전하다. 

 

기계는 창조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도 있고 파괴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도 있다. 기계는 인간의 자기발전을 도울 수도 있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도울 수도 있으며 자연과 사회의 현실에 밀접하게 관계하도록 도울 수도 있고 이러한 현실로부터 소외되도록 도울 수도 있다.

저자가 기술 옹호론이라고 본 입장이다. 하지만 기계나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라는 것이 내 입장이기도 하다. 그것이 기술과 기계의 옹호론일 수는 없다고 본다. 

 

제 3장 정치와 소외>

어떤 형태의 권력이건 유혹적인 것이며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필요한 권력과 개인적 목적을 위해 갈망하는 권력 사이에느느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없다고 하는 비관적인 견해는 과거와 현재의 상황에서 겪은 많은 경험으로 보아 정당한 것 같다. 지도자가 개인적 권력에 매혹되어 이 권력을 유지, 확대하고 싶다고 느끼게 되어 쉽게 동지를 저버리고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권력을 가질 수록 더 가지고 싶은 욕망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따라서 그런 욕망으로부터 거리를 가지려면 권력을 멀리하는 것 이외의 해법은 없다. 모든 정치권력은 기본적으로 타락하게끔 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항상 권력 밖의 사람들이 권력 중심의 사람들을 항상 의심하면서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제 4장 사회구조와 소외>

19세기에는 콩트(Auguste Comte)와 위대한 체게 수립가들의 영향 밑에서 사회학자들은 사회 이론을 주로 역사철학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19세기 초의 사회학 체계의 전제가 이미 타당하지 않으며 우리는 사회학과 역사의 관계를 다시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오늘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학에서 유행되는 사회학적 분석과 역사적 분석의 철저한 분리에 의해 우리는 이러한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가?

 

역사적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사회는 게마인샤프트가 지배적인 시대로부터 게젤샤프트가 지배적인 시대로 옮겨 간다고 퇴니스는 주장한다. 몇 세기 전에 시작된 이러한 과도기는 르네상스 시대에 시작된 변화, 특히 산업 혁명의 결과로 생긴 변화에 의해 가속되었다. 이것은 가차없고 회피할 수 없는 전환이다. 일부 낭만주의자처럼 현대 사회에서 인간 관계의 기계화가 증대되는 것을 슬퍼해도 소용이 없다. 게마인샤프트가 끊임없이 게젤샤프트로 굴복하는 과정이 우리들의 운명인 것 같다. 이를 회피하는 것도, 또한 게마인샤프트로 되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게마인샤프트는 우리 말로 '공동사회', '공동체'로 번역하고, 게젤샤프트는 '이익사회', '결사체'로 번역한다. 저자는 퇴니스의 견해에 동의하고 게마인샤프트에서 게젤샤프트로 이행하는 것인 인간 소외를 심화시킨다고 본다. 현대사회에서는 목적과 수단이 분리되고 돈을 위해 노동하며 인간관계도 이익을 위해 맺는다는 것이다. 

 

퇴니스의 두려움은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민족적 게만인샤프트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생활 방향을 역전시키려고 했을 때 비극적으로 확인되었다. 지나간 시대로 돌아가려고 하거나 게마인샤프트를 우리들 마음대로 부활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키우는 대신에 우리는 게젤샤프트로 향하는 경향을 우리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상황이 우리들로 하여금 직면하게 하는 도전과 대결할 줄 알아야 한다고 퇴니스는 강조한다. 우리가 이러한 과제를 회피하지 않고 완수하려고 할 때, 생활이 건전하고 게젤샤프트 시대의 저변에 있는 건설적인 에네르기가 나타나고 마침내는 게젤샤프트와 게만인샤프트의 보다 높은 형태를 발달시키고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단계에 이르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퇴니스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낙관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몰락을 확인한 우리들로서는 19세기말, 20세기초 퇴니스의 전망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도대체 게젤샤프트와 게만인샤프트의 보다 높은 형태가 무엇일 수 있을까? 도무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대부분이 노동에서 발견하는 만족은 우리가 수행해야 할 직업적인 활동에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만족은 주로 소비된 시간에 맞먹게 우리들에게 지급되는 월급 봉투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노동은 노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외부적 목적을 위해 수행된다. 이러한 노동은 인간이 수단과 목적을 구별할 줄 아는 사회, 그리고 자신의 생활과 목표하는 내적 관계는 없지만 인간이 거기서 이익을 얻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용하기로 <선택한> 수단을 이용하는 사회를 요구한다. 이러한 노동은 인간의 활동이 선택 의지의 계산에 의한 지시를 받는 곳에서만 수행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그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대부분은 돈을 벌지 않으면 최소한의 생계를 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생계를 위한 돈이 확보된 후에야 즐거운 노동을 할 수 있다. 생계를 꾸리기 위한 노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역시 돈을 벌기 위한 다른 사람의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역사가 인간소외의 역사라는 것이다. 

 

오늘날도 선택 의지의 비인격화된 활동과는 거의 공통점을 갖지 않은 노동 패턴을 발견할 수 있고 이러한 노동 패턴에는 앞에서 말한 수단과 목적의 구별은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헌신적인 성직자나 위대한 창조적 예술가나 뛰어난 교육자가 하는 일은 사람들이 주로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종사하는 직업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21세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성직자, 예술가, 교육자가 과연 생계형 노동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상대적인 차이는 있을 수도 있다. 좀덜 비인간적인 직업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지만... 코로나 시대에도 대면예배를 주장하는 목사나 환자의 목숨보다는 자기 이익이 중요한 의사에게 그들의 노동은 역시나 돈벌이이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이익을 무시하기 어려운 작가에게도 글쓰기는 돈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하는 헌신적인 목사나 의사, 교육자, 그리고 예술혼을 불태우는 작가나 예술가를 오늘날에도 기대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인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도 돈벌이를 위한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다. 저자도, 퇴니스도 경제적 동기로부터 자유로운 노동에 대한 환상은 품지 않았다. 공장노동자만이 아니라 교사, 예술가, 작가, 성직자도 노동 소외를 겪으며 지식인의 노동도 상품화되었다. 

오늘날 유투버, 연예인을 보면, 자기 자신을 물론이요, 배우자나 자녀를 동원하며 개인 사생활조차 돈벌이로 이용한다. 돈을 벌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품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사용가치를 고집하는 순진한 사람은 없다. 교환가치가 얼마나 돈벌이에 중요한지 다들 알고 있다. 내가 아무리 멋진 나무 탁자를 만들어도, 내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도, 내가 대단한 글솜씨를 발휘해도 소위 제 값을 치르고 사 줄 사람이 없다면 그것들은 모두 무가치하다.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의 분열보다 더 깊이 분열된 것이 상품 생산자와 노동자 사이의 분리이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자본론>>에서 간결하게 서술된 세계를 형성한다. 이 세계의 입구에는 <무용자 출입금지>라고 씌어 있고 <.....그들을 결합시키고 서로 관계를 갖게 하는 유일한 힘은 각자의 이기심, 이득 및 사적 이해 관계이다. 각자는 자기 자신만을 돌보고 다른 사람의 일로 걱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따라서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결합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 무관심, 그리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고 생산물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비인간적인 관계를 넘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무관심, 하청노동자, 재하청노동자에 대한 무관심이 노동자를 위험과 죽음에 내몰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노동자들 사이도 층이 나눠진 이 상황에 대해서 막스는 예측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은 20세기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왔고 소외는 한층 더 심화되었다.

 

노동자는 살아 있는 기계의 한 부분

노동자는 공장기계의 일부이고 그가 생산한 물품은 노동자에 속하지 않는다. 

 

<.....동물은 직접적인 육체적 욕구의 지배 밑에서 생산하지만, 인간은 육체적 욕구로부터 해방되었을 때에도 생산하고 이러한 욕구로부터 해방될 때에 비로소 자유롭게 생산한다>로 마르크스는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말한다.

(.....) 마르크스는 소외된 노동의 위험과 그것이 인간의 자유에 가하는 위협을 강조하지만 그는 소외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측면만을 주목하는것은 결코 아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인류는 소외의 고통과 이를 극복하려는 투쟁을 겪음으로써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것이 노동 과정에 참된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은 그의 에네르기를 외부 세계에 투입하며 그의 생명은 생산물에 스며들어 그 나름의 존재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대상으로 <객체화>, 다시 말하면 물질화된다. 이렇게 해서 생긴 생산물과 이를 만들어낸 힘 사이의 틈은 반드시 영속적인 것은 아니다. 생산물이 이미 생명의 밖에 있지 않고 생명과 다시 통합될 때에는 이 틈은 사라진다.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외가 다시 생산자와 생산품과의 통합을 통해 극복된다는 아이디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통합이 대체로 실패하리라 보았다. 

 

제 5장 회고와 전망-소외는 극복될 수 있는가?>

오늘날은 인간을 이해하려면 인간을 전체로서 보아야 하고 사회 문제를 <세부의 잡동사니>가 아니라 <단일한 전체의 상호작용하는 부분들>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인정되고 있다. 

(...) 사회의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견해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단지 입으로만 이러한 말을 해왔을 뿐이다. 그들은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성적 요인을 고립시키고 연구 중인 사회 현상을 많은 부분으로 세분하려고 하는 단편적인 접근법을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다. 

저자는 소외 극복을 위한 종교적 태도의 부활, 내면적 변화, 주객분리의 틈 메우기, 현실참여, 건전한 교육 등을 통한 소외극복의 방안들이 부족함을 지적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에서 비롯하는 소외를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만약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가 비롯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의 극복이외에는 대안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극복한 어떤 사회가 소외 없는 사회일 수 있을까? 그런데 마르크스는 [자본론] 3권에서 상품경제가 사라지더라도 자기실현을 방해하는 힘이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예고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외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하는 문제이고 해결되는 않는 문제라는 회의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 철학, 교육, 종교에서 소외 극복을 위해 불완전한 시도를 하는 것이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선이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한 사회에 대한 상상력이 빈약하고 그 사회를 극복해본들 소외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걸로 전망된다면, 절망과 좌절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론의 한계에 갇히지 말고 부족함이 있더라도 행동하면서 이론적 전망을 넓히는 것이 더 낫다. "사상가로서 사고하지 말라.....살아 있는 현실적 존재로서 사고하라"고 했던 포이에르바하의 말이 생각나는데, "살아 있는 현실적 존재로서 행동하라"로 고쳐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