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2020. 9. 4. 21:22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의 관점

한줄 느낌: 속시원하다

 

이 책의 저자 이라영은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 인권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에 실린 글 대부분은 여성인권과 관련한 내용이지만 노동자, 성소수자, 유색인종 등과 같은 소수자 인권도 함께 거론한다. 저자의 소수자 인권에 대한 분명한 관점이 글에 그대로 드러난다. 저자의 관점은 참으로 반듯하고 바르다.

"여기에 쓴 글은 일상에 스며 든 약자 혐오와 차별, 구별 짓기 등 심하게 기울어진 의식에 질문을 던져보는 작업이다. 익숙해진 일상을 익숙하지 않게 들여다보고 싶다."(머리말 중에서)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란 제목을 보면서 인권이 지켜지지 않고 누군가를 차별하는 사회에서 차별받는 소수자를 환대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한다. 그런데 소수자를 환대까지 하지 않더라도 차별하지 않고 관용하는 정도라도 사회는 좀더 정의로와질 것 같다. 

 

노트> "2015년 여름 발생한 워터파크의 몰래카메라 사건처럼 공중화장실을 비롯하여 리조트의 샤워실, 병원, 학교, 심지어 제 집에서조차 몰래카메라가 여성들의 일상을 감시하고 있다. 안전한 곳은 없다. '안전'은 전혀 평등하지 않게 배치되어 있다. 가장 긴장이 해소되는 공간이 화장실에서조차 여성은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머리말 중에서)

누구는 더 안전하고 누구는 덜 안전한, 차별적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 안타깝지만 사실이라 화난다.

'안전'에 있어 불공정함은 여성은 물론이고, 다른 소수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무서움'이나 '더러움'이 아니다. '피한다'는 태도다. 그렇게 나는 피할 수 있겠지만 누군가는 또 그 무서움, 더러움과 마주해야 한다. 나 역시 남이 피한 무서움, 더러움과 맞닥뜨린다. 모두 피하기만 하며 살 수는 없다. 누군가는 치워야 한다."(머리말 중에서)

"나이를 극복하고, 장애를 극복하고, 인종적 편견을 극복하고, 가난을 극복하고... 극복해야 할 요소가 많을수록 약자다. 극복하지 '못한' 이들은 게으르고 무능력한 낙오자가 된다. (머리말 중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 대중이란 '소비할 수 있는 집단'이다. 상품이든 정보든 소비할 수 있는 주체여야 대중으로서의 존재감을 가진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것은 미디어에 접근하기 어려운, 그래서 '여론을 형성할 수조차 없는 계층'의 목소리가 걸러지고 있다는 점이다."(하나일 수 없는 99퍼센트 중에서)

"가난한 이들의 도박, 생명보험, 복권에 대한 집착도 빈곤의 결과이다."(가난을 착각하다 중에서)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이를 모른 척하는 사회의 방관 속에서, 그 아이들은 가해자로 성장할 수도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괴물에게 납치되는 계급적 운명 중에서)

"프랑스인의 91퍼센트는 많은 사회문제 중에서 '외로움'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고 있었다. (...) 우리도 경제 순위 세계 몇 위라는 걸 강조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마음 건강'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관심 가질 필요가 있겠다.

개인의 외로움이 사회와 단절된 채 방치되다 보면 결국 우울증, 광적인 종교집착, 중독증, 폭력 등의 형태로 나아가며 어느덧 그 무거움 속에서 익사하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현재 '인간소외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인격관계의 상실 중에서)

극우 기독교 광신도는 외로웠던 것일까?

"미셸 푸코는 '주체와 권력'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권력의 양상은 구원에 지향점이 있다."라고 했다. 종교가 오랫동안 인간을 다스릴 수 있었던 근본 이유는 궁극적으로 내세에서 개인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이것이 푸코가 표현한 '영성적 권력'이다. 종교와 신앙은 별개이며, 종교는 늘 사랑을 내세운 '권력'이었다."(인격관계의 상실 중에서)

요즘 사랑제일교회현상을 보면서 든 생각도 바로 '영성적 권력'의 힘에 대한 것이었다. 그 힘은 생각 이상으로 강력하다. 

"여성을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출산을 하거나 남성의 성욕을 위한 '거대한 자궁'이라는 틀에서 바라보면 여성이라는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이 생물학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 성스럽거나 혐오스럽거나 중에서)

자연과 문화, 몸과 정신처럼 대립항을 설정해서 생각하는 것의 한계는 분명하다.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건 남성이건 자연적 존재이자 문화적 존재이며 몸이자 정신이다. 개념의 대립항을 구성하는 것은 생각의 편의상하는 것일뿐임을 잊지말자.

"서울보다 훨씬 지저분한 파리에도 '디자인'을 가장한 '눕기 불편한 의자'들이 지하철역에 가득하다. 공원 벤치에는 팔걸이가 늘어난다. 노숙인이 눕지 못하게 정책적으로 방해하고 있다."(도시의 유령이 쉴 곳 중에서)

그런 의자는 파리에만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동네에도 있다. 벤치 중간을 구획하는 팔걸이를 볼 때마다 배제와 혐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과잉 노동으로 근근이 살아가거나 아예 노동할 기회조차 없거나, 둘 중 하나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과로로 목숨을 잃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스스로를 '잉여'라고 한다. 결국 시간이 많으나 할 일이 없는 잉여 노동자와 일거리는 많으나 늘 시간이 부족한 과로 노동자로 양분된다. 모두 빈곤하다."(시간의 빈곤을 겪는 노동자 중에서)

내가 이 진실을 알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우리 사회에서는 조금 일하고 조금 벌어 생계를 꾸리며 먹고 사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진실말이다. 지나치게 많이 일하거나 아니면 전혀 일을 하지 못하거나, 둘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현실은 참으로 냉혹하다. 조금 일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렇게 일하다가는 딱 굶어죽기 좋다. 

"<만종>은 <이삭줍기>와 함께 너무도 유명하여 '이발소 그림'으로 많이 활용한다. 이발 소 그림이란 이발 소에 하나쯤은 걸려 있을 정도로 흔한 복제 그림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지만, 그만큼 대중들에게 친숙한 그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성장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중에서)

밀레의 <만종>은 어린 시절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도 안방에 떡하니 걸려 있었다. 어릴 때는 그 그림을 보면서 왜 그 그림을 걸어두었는지 궁금했었던 기억이 난다. <만종>의 복제그림이 그만큼 흔했기 때문이었구나. 

"인간이 자연을 폭력적으로 대할수록 자연은 그 대가를 더욱 더 적극적으로 인간에게 돌려줄 것이다. 자연은 수동적이지 않다."(자연이란 이름의 식민지 중에서)

전염병, 기나긴 장마, 태풍으로 이어지는 올 한해는 기후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연은 절대 수동적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이다움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착각 속에 살고 있다. 모두가 거쳐 온 세계지만 쉽게 망각 속으로 사라진 세계가 아이의 세계다. 전쟁도 놀이가 될 수 있는 아이들의 '동심' 속에는 이미 인간세계의 각종 폭력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모성애에 대한 신화만큼 동심도 어른의 시각으로 발명된 세계다. 어른은 아이에게 자신이 보고 싶은 세계를 요구한다. "(강요한 순수에 저항하기 중에서)

아이는 천사와 같다,라는 말을 난 믿지 않는다. 원래 천사란 상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상상의 존재가 아니라 현실의 존재다.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문화적 영향을 받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존재로서 명백히 자신의 생존에 집착하는 존재다. 그 점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면 아이는 천사야,라는 따위의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서 선녀는 나무꾼과 사슴 사이에서 거래되었다. 사슴은 자신을 구해준 '착한' 나무꾼에게 포상으로 선녀를 선물하는데, 그 선녀를 '취하는' 방법까지 알려 준다. 목욕을 할 때 옷을 훔쳐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다. 여성 납치와 몰래카메라 범죄를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역사는 먼 옛날 이야기 속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순결의 인수인계 중에서)

"'출산하지 않은 여성'과 '어머니'라는 구별은 모성 신화와 이성애라는 두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엄마가 구해줄께 중에서)

"페미니즘과 패션이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이 아님에도 여전히 페미니스트들 중에는 패션 잡지를 즐기는 자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사실 페미니스트는 패션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 같은 이미지를 전통적 매체에서 계속 생산하고 있기도 하다."(여성지와 여성주의 중에서)

프랑스 여성학과를 다니던 페미니스트 친구는 페미니스트 교수의 화려한 패션에 놀라워했다.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딱했다. 아니 여전히 딱딱한지도 모른다. 한 30대 여성은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자신의 패션이 비난받았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여전히 한국의 페미니즘은 유연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패션과 패미니즘이 대립하는 두 항이 아니라는 저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조차 여성의 겨드랑이털은 잘 감춰져 있다. 여성의 벗은 몸을 전시하되, 그 몸은 남성과 차별화된 몸이어야 한다."(벗은 남자 중에서)

프랑스에서 만난 독일 친구가 내게 자신이 겨드랑이털을 깍지 않고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는데 프랑스 여성들이 자신의 모습에 대해 쑥덕대더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독일 친구는 여성이 수영복을 입는다고 해서 왜 겨드랑이털을 꼭 깎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프랑스 여성의 유별스러움에 대해 놀라워했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여성도 겨드랑이털을 깎지 않고 수영복을 입을 수 있겠구나,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프랑스 여성들이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좀 놀랐던 기억도 난다. 우리나라에서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여성이 있다면,  수영장에서 겨드랑이털을 깎지 않은 여성이 있다면 큰 구경거리로 삼을 것이 분명하다. 사회에 따라서 여성이 몸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시선이 차이가 난다. 아무튼 여성은 어느 사회이건 주변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랑은 노동이다. 관계를 생성, 유지, 나아가 말소시키는 순간까지도 상당한 육체적, 감정적 노동이 요구된다. 타인은 나의 쉼터가 아니다."(사랑은 노동 중에서)

불현듯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타인은 때로는 지옥이고 때로는 쉼터이다. 그것이 사랑이더라도 다른 건 없다.

"2015년 12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이용득은 박근혜의 저출산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결혼 안 해 보고 출산 안 해 보고 애 안 키워 보고"라고 말했다. 이처럼 독신 여성이 최고 지도자가 되자 공개적으로 활발히 드러나 혐오의 얼굴이 있다 .어쩌면 그 혐오의 얼굴을 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이 박근혜의 유일한 업적일지도 모른다."(박근혜와 이자스민 중에서) 

박근혜의 업적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내 짧은 생각을 반성하게 한 구절이다. 결혼하지 않고 출산하지 않고 양육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혐오의 얼굴을 드러나도록 했다는 것이 박근혜의 업적이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성희롱은 개인간의 분쟁이라기보다 '차별이 가능한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범죄'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타자에 대한 희롱은 그 존재에 대한 존중의 결핍, 즉 차별 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차별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행동은 취향의 다양성이나 표현의 자유와는 무관하다. 파리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포스터의 글귀다. "차별은 견해가 아니라 범죄다.""(성희롱은 범죄다 중에서)

우리 사회에서는 차별을 의견인양 당당히 발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차별은 견해가 아니라 범죄라는 글귀는 그 점에 명쾌하다. 차별과 혐오를 당당히 발언하는 한국사회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성'을 위해 '비인간적' 처벌을 한다는 이 모순된 사고방식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차별의 가해자들은 언제나 '좋은' 목적을 위한다는 미명으로 소수자와 약자를 사회에서 제거하려 하고, 이것이 그들 나름의 정의 구현이라고 생각한다."('양성'은 불가능하다 중에서)

"우리는 '우리'라는 정상 범주에 속하기 위해 무수한 '나'들을 깎으며 산다. 정상적인 사람으로 완성된 가정을 이뤄야 정상적인 삶이다. 이 정상의 기준 때문에 이혼한 사람, 한 부모 가정, 성소수자, 노처녀, 노총각, 비혼모 등은 감옥 같은 타인의 시선을 견뎌야 한다."(정상적인 사람들 중에서)

'정상'이라는 미명 하의 폭력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그 정상의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인가?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 기준을 정한다. 그래서 지금 이순간에도 그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 다들 몸부림을 치고 발악을 하는 것이 아니겠나. 

"제도화된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문화나 전통, 국민 정서 등으로 둔갑하여 우리와 한 몸이 되어 있다."(정상적인 사람들 중에서)

"나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무섭다. 살면서 내게 가장 쉽게 상처 준 사람들은 대부분 정상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정상적인 사람들 중에서)

저자의 고백이 가슴에 와 닿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잘 들여다 보면 소수자로서 권력의 외곽에 위치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누구는 여성이라서, 누구는 장애인이라서, 누구는 수도권에 살지 못해서, 누구는 성소수자라서, 누구는 장애인이라서 누구는 학력이 낮아서, 누구는 가난해서, 누구는 유색인종리라서... 등등 내가 남성이라도 장애인일 수 있고, 내가 백인이라도 성소수자일 수 있고, 내가 학력이 높아도 유색인종일 수 있고... 우리는 어떤 점에서는 다수자일 수도 있지만 소수자일 수도 있다. 자신의 소수자인 점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세상의 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다수자인 점을 더 주목하고 소수자인 점은 보지 않으려고 하니까 약자의 인권에 대해 무심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기인식이 중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