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연습 > 3. 시체에 대한 공포 들여다 보기

밤사이 세찬 비바람으로 잠을 좀 설쳤다. 그렇다고 오전 산책을 포기할 수는 없다. 평소 다니던 대로 도로를 피해서 동네 사이 길을 따라 걸었다. 자동차 소음이 요란스러운 외곽순환도로 위의 다리를 건너면 키 큰 참나무들이 줄 지어선 흙길이 나온다. 지난밤에 내린 비 때문에 땅에는 아직도 군데군데 빗물이 고여 있었다.
 
물웅덩이를 피해 풀을 살짝살짝 밟으면서 걷고 있을 때였다. 풀 위에 검은 회색빛 털 뭉치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두더지다. 태어나서 두더지를 직접 보긴 처음이다.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누운 이 작은 짐승은 숨이 끊긴 상태였다. 왜 여기 이렇게 죽어 있는 것일까? 지난밤 빗물로 두더지 굴에 물이 가득 차서 도망 나오다 숨이 막힌 것일까?
 
나는 두더지를 살짝 뒤집어 보았다. 두더지의 몸은 이미 뻣뻣하게 굳었지만, 몸의 털은 살아 있는 것처럼 윤기가 흘렀다. 상처 하나 없는 말끔한 모습이었다. 죽은 지 그리 오래 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제 늦은 오전, 이 길을 걸었을 때만 해도 풀 이외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었다. 나는 두더지를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기고 싶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물이 아닌 사체를 건드리는 것이 왠지 불편했다.
 
나는, 죽은 것이 싫다
 

▲ 나는 두더지를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기고 싶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물이 아닌 '사체'를 건드리는 것이 왠지 불편했다.     © 이경신

나는 어릴 때부터 유독 죽은 것을 싫어했다. 살아 있는 동물들은 –지렁이를 제외한- 그 어떤 동물에 대해서도, 말하자면 쥐나 뱀, 애벌레조차도 거리낌 없이 대하고 만지곤 했다. 하지만, 죽은 동물은 불편하고 가까이 하기가 싫었다. 만질 엄두도 내질 못했지만 바라보는 것도 끔찍했다. 그래서 작은 곤충, 심지어 해충으로 불리는 파리나 바퀴벌레와 같은 곤충들도 죽이길 싫어했고, 죽어 있는 것은 피했다. 


지금도 고등학교 시절 학교 하수도 청소를 떠올리면 어떻게 내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하수도가 더러워서 청소일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죽은 쥐들을 치우는 일이 괴로웠던 것이다.
 
학교가 산중턱에 위치해서인지 우리 학교에는 특별히 쥐가 많았다. 학교 정원은 물론이고, 교실에도 쥐들이 발견되어 수업시간이 온통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학교 측에서는 쥐를 잡겠다며 쥐약을 놓았고, 그 약을 먹은 쥐들이 하수도로 뛰어들은 것이다.
 
덕분에 하수도 청소담당이었던 우리들은 더러운 오물 속에 죽어 있는 쥐들을 뒤처리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퉁퉁 부풀어 오른 쥐의 사체를 건져 소각장에 버리는 일은 그 누구도 쉽게 떠맡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하수도 청소반장이었던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다. 끔찍한 몰골의 쥐들을 애써 외면하면서 소각장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멀게 느껴졌던가.
 

그때만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죽은 쥐를 치우는 일을 해낼 수 있었지만, 그 이후 도로바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새들이나 작은 짐승들, 길에 나동그라져 있는 고양이 등 죽은 동물들은 마주할 일이 생기면 일단 고개부터 돌리면서 지나갔다. 내게 죽은 동물은 마주대하기 싫은 무엇일 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어쩌다 부딪치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이하 생략)
 

아래 <일다> 에서 계속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6200&section=sc71&section2=




Posted by 고마리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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