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13> 그리운 이름


남 프랑스의 몽쁠리에(Montpellier)라는 도시로 여행을 왔다. 몽쁠리에는 10여년 전 내가 어학연수를 했던 곳이다.
 
몽쁠리에로 가기 위해 이른 새벽 기차를 타고 오전 내내 프랑스 내륙을 달렸다. 브르타뉴의 목초지와 밀밭 풍경은 어느새 해바라기 밭으로 바뀌고, 햇살이 완연히 다르다고 느껴질 즈음에는 포도밭과 올리브밭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다. 창 밖이 온통 이런 풍경이라면 남부 깊숙이 접어든 것이다. 그러다가 기차에서 내려 역을 빠져 나와 햇빛에 후끈 달아오른 남부의 공기에 휘감기자, 남불에 도착했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몽쁠리에 주인집 할아버지, 무슈 꾸르꾸
 
오늘은 지중해변으로 해수욕을 하러 갔다. 여름 지중해를 보니, 몽쁠리에에 살던 때 해수욕을 하러 왔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당시 방 한 칸을 세내어 살았던 주인집 할머니, 할아버지와 여름 방학 내내 바닷가에 왔었다.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잠시 빈둥거리고 있으면 방 밖에서 할머니가 소리쳤다.
 
“인진, 해변에 가자!”
“네~!”

 
큰 소리로 얼른 대답하고는 간단한 것을 주섬주섬 챙겨, 늘 우당탕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주인집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잊지 않고 해수욕을 갈 때마다 나를 챙기셨다. 그 해 여름, 그렇게 자주 해수욕장에 다닐 수 있었던 건 모두 집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덕분이다.
 

▲ 한 꼴롱바주 건물에 새겨진 브르타뉴의 부부 모습. (Vannes에서)  ©정인진

생각해보니, 그때 주인 할아버지는 브르타뉴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내내 브르타뉴에서 살다가 따뜻하고 햇볕이 좋은 남부 프랑스로 이사를 온 것이 10여년 전이라고 했다. 할머니도 무척 상냥한 분이었지만, 60대 중반의 꾸르꾸(Courcou)씨는 더욱 다정한 분이었다.
 
저녁식사 때마다 시원한 로제(rose)포도주를 한 잔씩 주셨기 때문에 그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한 잔 하겠냐고 내게 물을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다고 늘 잔을 내밀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나도 로제를 한잔 정도 마시는 건 참 좋았다. 할아버지는 포도주를 따를 때마다 우리나라 식으로 잔을 두 손으로 바쳐 들고 있는 나를 늘 재미있어 하였다.
 
몽쁠리에가 있는 랑그독-루시옹(Languedoc-Roussillon)지방은 적포도주나 백포도주가 아니라 ‘로제’라 불리는 분홍빛 포도주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로제’는 백포도주처럼 냉장고에 넣었다가 시원하게 마시는 것이 특징인데, 꾸르꾸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지금도 포도주 중에서 ‘로제’를 가장 좋아한다.
 
할아버지는 가끔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하러 다니셨는데, 크게 소용될 것 같지도 않은 작은 포도나무 토막과 향이 좋은 향나무 토막을 잘라 내게 가져다 주기도 하셨다. 물론, 나는 이것들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한번도 이런 걸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씀 드린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나무토막을 주실 생각을 했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이미 가로수 가지치기를 하는 곳에서 잘려 뒹구는 은행나무 토막을 주워다 책꽂이 앞에 장식을 했던 애였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프랑스에서 첫 해, 1월에도 내내 들꽃들이 피어있는 남부 프랑스에서 ‘여기는 언제 겨울이 오나’ 생각하며 매섭게 추운 겨울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꾸르꾸 할아버지가 내게 말씀하셨다.
 
“인진, 이제 겨울이 끝났다. 봄이 올 거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말도 안돼요, 겨울이 가다니! 매일 매일이 가을 같았는데…. 겨울이 가다니요! 나는 겨울이 필요해요! 아주 춥고 건조한 그런 겨울이요!”
“허허! 그럼, 내가 인진이를 위해 겨울을 주문하도록 하지.”

 
이렇듯 꾸르꾸 할아버지와 나는 장단이 잘 맞았다. 그러나 그 분의 고향이 구체적으로 브르타뉴 어디인지 나는 모른다. 그분의 고향 도시를 아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마는 꾸르꾸 할아버지의 고향을 여쭈어보지 않은 것을 요즘처럼 안타깝게 생각한 적이 없다.


릴의 기숙사에서 만난 상냥한 청년, 에띠엔느
 
브르타뉴 지역 출신과의 인연이 꾸르꾸 할아버지에서 끝난 것은 아니다. 북부 릴에서 유학을 할 때, 8개월 간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했던 상냥한 에띠엔느가 요즘 들어 부쩍 생각나는 건 그가 바로 브르타뉴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에띠엔느한테도 브르타뉴 어느 도시 출신인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그의 성조차 모른다.
 
당시 내가 살았던 기숙사는 10여 명이 지낼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시설이었는데, 외국인과 프랑스인, 학생과 직장인, 또 여성과 남성이 비교적 골고루 섞여 있었다. 에띠엔느는 직장 때문에 브르타뉴보다 산업이 발달한 북부로 이주한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주말에는 종종 브르타뉴에 살고 계신 부모님 댁을 방문하고 릴로 돌아오곤 했다. 브르타뉴에 갔다가 돌아올 때면, 에띠엔느는 부모님 농장에서 직접 짠 우유나 그가 좋아하는 곰팡이가 잔뜩 핀, 냄새조차 고약한 치즈들을 한아름 가져왔다.
 
에띠엔느의 방에는 커다란 브르타뉴 깃발이 걸려 있었고, 그는 브르타뉴 출신이라는 걸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브르타뉴 지방의 언어와 문자가 따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안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에띠엔느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워 그 언어를 조금 안다고 했다.
 
에띠엔느가 고향으로 가지 않는 주말에는 브르타뉴에 살고 있는 애인인 마리-앙드레가 가끔 놀러 오기도 했다. 기숙사에 사는 외국인이라야 네델란드나 벨기에처럼 근처 출신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들조차 가족들과 주말을 보내러 자기 나라로 떠나면, 주말에는 나 혼자 기숙사에 남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 마리-앙드레가 오면, 에띠엔느와 마리-앙드레는 내게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벨기에의 ‘브뤼쥬’와 ‘투르네’를 다녀온 건 바로 그들 덕분이었다.
 
그러면 나는 한국요리를 해서 그들을 식사에 초대하기도 했고, 마리-앙드레도 특별한 프랑스 요리를 해서 나를 초대하였다. 애인과 떨어져 1년을 살았던 에띠엔느는 릴에 집을 구했고, 마리-앙드레도 북부로 이주해 기숙사를 떠났다. 그 당시 상냥한 에띠엔느가 아니었다면, 기숙사 생활을 그만큼 즐겁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세요?” 묻는 브르타뉴 시민들
 

▲ 우리 동네 빵집의 파티시에(patissier) 아저씨들.    © 정인진


그리고 다시 지금 이곳 렌에서 상냥한 브르타뉴 사람들을 만나면서 산다. 나는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 살아보기도 하고 여행도 많이 해보았지만, 브르타뉴인들만큼 친절한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길을 잘 확인하기 위해 거리에서 지도를 펼쳐 들기라도 하면 “도움이 필요하세요?” 라고 물으며 어디선가 바로 사람들이 나타나 먼저 친절을 베푸는 것을 경험한 곳은 브르타뉴가 유일했다. 그래서 이곳에 도착한 초창기에는 지도를 꺼내기조차 눈치가 보였다.

 
또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잠시 멈추면, 지나가던 차들이 바로 멈추는 곳도 브르타뉴가 처음이다. 다른 지역의 운전자들도 길을 건너려는 사람 앞에서 차를 멈추는 일은 많았지만, 브르타뉴 사람들은 길 가장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차를 멈추고 건너라는 손짓을 할 때가 많다. 한 번은 빨간 신호등에서조차 건너가라며 차를 멈추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경험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감동하는 건, 시 정책에서도 친절한 면모를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본 경험이 있는 도시인 몽쁠리에나 릴은 ‘꽁트롤레르’(controleur)라고 불리는 검사원들이 불시에 버스나 지하철에 들이닥쳐 차표를 검사할 때가 있다. 평소엔 자율적으로 차표를 기계에 찍게 되어 있어, 학생들 중에는 버스비를 내지 않고 타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버스검사관이 들이닥쳤을 때 차표가 없는 사람은 차비의 2백~3백배를 벌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그 자리에서 수표를 쓰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찰서로 끌려 간다.
 
렌 지역이라고 해서 버스검사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렌은 불시에 차표를 검사하는 검사원은 없다. 젊은 아르바이트생들이 가끔 버스나 지하철 입구에서 차표를 검사할 때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차비가 없는 사람은 차를 안 타면 되고, 또 차비를 내지 않으려고 생각했던 사람은 마음을 고쳐먹고 버스 운전사나 지하철 자판기에서 표를 사면 되니, 엄청난 벌금을 물을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나는 렌 시의 이런 교통정책에서조차 상냥한 브르타뉴의 모습을 읽는다.
 

▲  브르타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작품. (브르타뉴 박물관)   © 정인진


세월이 지나서는 그리운 사람이 되어 있는 몽쁠리에의 꾸르꾸 할아버지와 릴의 에띠엔느처럼, 다시 한참 세월이 지나면 브르타뉴를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내게 마을 주민이기도 하고 이웃이기도 했던 브르타뉴 사람들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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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12. 바캉스 행렬에 끼어 

미리암의 별장에 초대받다 
북부 프랑스에 살고 있는 미리암이 바캉스 때 자기네 별장에 놀러 오라고 제안했다. 미리암은 옛날 유학 시절에 세 들어 살았던 집의 주인이다. 작년에도 그녀의 별장이 있는 앙블르퇴즈(Embleuteuse)에 초대받아 며칠 지내다 왔는데, 잊지 않고 올해도 바캉스를 즐기러 오라고 초대해준 것이다.
 
바캉스 이주 행렬에 합류해 앙블르퇴즈가 있는 프랑스 최북단 해안으로 여행을 떠났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이곳 북부 해안에서는 영국의 흰 석회절벽이 멀리 어른거리며 보인다. 영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 해안으로, 4km 너머가 영국이라고 한다.

▲ 여름 휴가 기간, 프랑스 최북단 해안에 있는 앙블르퇴즈의 마을 축제에서 만난 가장 행렬.   © 정인진


마침 내가 도착한 날은 마을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동네 음악, 무용 클럽 회원들이 그동안 쌓은 기량을 뽐내며 행진을 했다. 어린 꼬마부터 성인들까지 한 대열에 섞여 곤봉을 돌리거나 악기를 연주하면서 행진하는 모습이 정답게 느껴졌다. 젊은 남자들은 우스꽝스럽게 여장을 하고 색색의 양산을 높이 받쳐 들고 행렬을 뒤따랐다. 북부 프랑스 축제는 늘 이런 변장과 퍼레이드로 채워진다.
 
행렬에는 해안에서 보트를 운반할 때 쓰는 트랙터들도 동원되었다. 인형을 주렁주렁 매달기도 하고, 동물농장처럼 꾸미기도 한 트랙터들은 모두 어린이들을 실은 수레를 뒤에 매달고 털털거리며 행렬에 합류했다. ‘트랙터 마차’에 탄 아이들은 지나가면서 길가에 늘어선 관중들에게 물총을 쏘기도 하고, 종이로 만든 눈가루를 뿌리며 흥을 돋웠다.
 
여름이 온 것을 축하하는 북 프랑스의 이 유쾌한 마을 축제는 짜임새가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툴고 허술한 광경에 더 웃음이 나왔다.
 

▲ 지난 해 여름에는 미리암의 외가친척들과 다과회를 가졌다.  © 정인진

작년에는 성모승천일(8월 15일)을 끼고 앙블르퇴즈에 왔었다. 이곳에 미리암의 부모님과 외가 식구들의 별장이 있는데, 그들은 여름마다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인 미리암의 친척들은 성모승천일 기념미사가 있던 날, 오후에 간단한 다과회를 가졌다. 나도 다과회에 초대를 받았는데, 상냥한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어울려 정원에서 함께 차를 나눠 마셨다. 흥이 오른 할머니들은 옛날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번 방문 중에는 그분들을 뵙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는 찬바람 부는 해변에서 미리암 부부와 여름을 보내러 온 이웃들과 식사 전에 즐겨 먹는 짠 과자와 음료수를 나누며, 저녁마다 늦도록 수다를 떨었다. (‘아페리티프’라고 부르는 과자를 이들은 식욕을 돋우기 위해 먹는다고 하는데, 우리 입맛으로는 절로 밥맛을 잃게 하는 것 같다.)

 

가사도우미, 아르바이트생도 ‘유급 휴가’ 즐긴다
 
7월 14일은 프랑스 최대 경축일 중 하나인 ‘시민혁명’ 기념일이다. 이날 밤, 전국 각 도시마다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여름 휴가에 들어간다. 이곳에서 8월 한 달은 존재하지 않는 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7월말까지 모든 시설의 업무가 끝이 난다. 관공서와 회사의 일년 업무가 끝나는 것도 바로 이 시기다. 학교 역시 7월이면 1년이 마무리되고, 9월에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다.
 
프랑스에서는 7월과 8월 사이에 모든 시민에게 5주의 바캉스가 주어진다. 주당 35시간 노동제가 법제화된 이후부터, 노동 시간을 조정할 경우에 최고 9주까지 휴가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내가 놀란 것은 이 여름 휴가가 ‘유급’이라는 사실이다! 프랑스인들은 모두 8월 한달 동안 유급 휴가를 즐긴다. 기업체는 물론 개인이 고용한 사람에게도 휴가비를 주어야 한다.
 
유학 시절, 미리암 집에 살았던 3년 내내 나는 그녀의 세 아이들을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개인이 고용한 아르바이트생조차 고용인은 여름 휴가와 휴가비를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7월말이 되자 미리암은 지난 11개월 동안 내가 받은 임금을 합해, 한달 평균 금액을 계산해서 휴가비로 주고 바캉스를 떠났다. 뜻밖의 소득에 놀라는 나를 보고, 그녀는 프랑스에서는 이렇게 휴가비를 주는 것이 의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가사도우미나 집사 같은 이들도 그를 고용한 사람들로부터 모두 휴가와 함께 휴가비를 받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개인적으로 고용된 사람들조차 휴가비를 받아서 바캉스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가난한 이들의 바캉스를 지원하는 국가와 시민들
 
여기서는 여름이 되면, 그동안의 빡빡했던 생활을 벗어나 모두 한가로운 시골이나 관광지로 휴가를 떠난다. ‘여름집’이라고 부르는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고, 부모님 댁을 방문하기도 한다. 내가 1년간 살았던 남 프랑스의 노부부 가정의 경우, 여름마다 파리의 큰아들 가족과 런던에 살고 있는 둘째 아들이 휴가를 보내러 왔다.
 
물론,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들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도움을 주려고 애쓰고 있다. 예를 들어, 저소득층 가정의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이 바캉스를 즐길 수 있도록 금전적인 지원을 하거나, 가족들이 함께 머물 수 있는 휴가지를 제안해 준다. 정부는 각 가정에 직접 돈을 주기도 하고 바캉스 센터나 레저 센터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 등 다양한 정책을 편다.
▲ 여름이 되면 아삐네 호수는 야외 수영장으로 변한다.  시민들은 이곳에서 물놀이와 일광욕을 즐긴다.   © 정인진

이런 지원이 국가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각 지방자치단체들 역시 주민들이 바캉스를 잘 보낼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렌 시도 여름휴가 기간에는 여행과 레저 프로그램들이 펼쳐진다. 7월 17일부터 8월 21일까지는 매주 수요일마다 교통비 정도의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일일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 해수욕을 할 수 있는 해안도시 두 곳과 내륙의 한 관광도시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여행할 수 있다.
 
7월이 되면 렌 외곽에 있는 ‘아삐네’(Apigne)호수는 야외 수영장으로 변한다. 멀리 휴가를 떠나지 못한 주민들은 이 호수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물놀이를 즐긴다. 봄부터 날라온 모래 위에서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고, 모래사장 앞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는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도 가득하다. 자동차가 없는 사람들도 쉽게 이곳에 올 수 있도록 여름에는 ‘아삐뷔스’(Apibus)라는 특별 버스까지 운행한다. 또 여름 내내 시청 앞 광장에는 일광욕을 위한 의자들이 가득 펼쳐진다.
 
정부와 지자체의 노력뿐 아니라, 시민들의 참여 역시 눈 여겨 볼만하다. 텔레비전에서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가 알프스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자원봉사자 덕분에 그곳 가정에서 방학을 보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많은 시민들이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이 여름방학에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돕는다. 이곳에서 여름 바캉스는 여유 있는 몇몇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건 분명 아닌 것 같다.
 
휴식과 여행을 권하는 나라
 
▲ 일광욕 의자를 놓은 렌 시청 앞 광장. 이 날은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는데, 흐린 날에도 렌 시민들은 의연하게 일광욕을 즐긴다.   ©정인진
프랑스의 유급 휴가는 1936년 6월 법으로 2주가 의무화된 것이 시작이다. 그것이 1956년에는 3주, 1968년에는 4주, 1982년에는 5주로 늘어났다. 이 유급 휴가 덕분에 여행, 스포츠, 레저 산업이 활성화되었고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도 늘어났다고 한다. 또 전국민이 여름을 즐기게 되자, 철도요금과 바캉스를 보낼 수 있는 장소 이용료가 인하되었다.

 
국가 차원에서는 여행부(le ministere du Tourisme)가 신설되고, 대중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조직들도 만들어졌다.
 
프랑스도 우리 나라처럼 도시에 사람들이 집중되고 시골이나 섬은 점점 공동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긴 유급 휴가 덕분에 여름에는 시골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텅 빈 섬들도 적어도 여름 동안에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국민을 좀더 쉬게 해주기 위해 고안된 이런 정책이 결국 더 큰 경기 활성화를 이끌어내고, 주민들이 줄어가는 도서벽지에 새로운 방식으로 활기를 불어넣어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에게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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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11. 브르타뉴의 성곽 도시들3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외국인인 나를 신기해하며 말을 건네는 이들이 가끔 있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 여기서 뭘 하냐? 등등. 브르타뉴를 여행 중이라고 대답할 때마다  ‘그럼, 생말로(Saint-Malo)는 가보았냐’는 질문을 들을 때가 많다. ‘아직 가보지 못했다’고 하면, 그 사람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꼭 가봐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강조하곤 했다.
 
그래서 생말로는 다른 어느 곳보다 재빨리 달려가 보았다. 소문대로 그곳은 아름다운 도시가 분명했다. 그러나 생말로를 다녀올 때마다 생말로의 진정한 모습을 만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거둘 수 없었는데, 오랫동안 나는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다시 생말로에 다녀왔다.
 
성곽 위를 걸으며 본 생말로의 진풍경
 
생말로는 랑스(Rance)강 하구에 자리잡은 도시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옛 시가지에 1년 내내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성곽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생-뱅상문(La porte Saint-Vincent, 1708년)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쉬워 보인다. 특히 버스나 기차를 타고 생말로를 간다면, 이 문 앞에 꼭 닿게 된다. 기차에서 내려 약 30분 동안 부둣가 도로를 통과해 걸어왔다면, 틀림없이 들었을 실망감을 이제 거둬들여도 될 것이다.

▲ ‘생-뱅상문’ 아래 박혀 있는 담비가 그려진 징.  이 담비가 우리를 명소로 안내한다고 한다.    © 정인진


나는 이 생-뱅상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가는 걸 좋아한다. 그 이유는 이 문 입구에 있는 맨홀 뚜껑과 바닥에 박힌 금빛 징 때문이다. 생-뱅상 문 바로 밑바닥에는 뚜껑에 생말로 도시 문장이 새겨진 맨홀이 두 개 있다. 유명한 관광지에서나, 그것도 드물게 볼 수 있는 도시 문장의 맨홀 뚜껑을 생말로에서 보았을 때, 드디어 진정으로 세계적인 관광지에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나는 그 이후 브르타뉴 어디에서도 이렇게 멋진 맨홀 뚜껑은 본 적이 없다.

 
사실, 맨홀 뚜껑보다 더 내 눈을 사로 잡은 건 그 바로 옆에 박혀있는 노란 징이다. 이 징에는 브르타뉴를 대표하는 담비(hermine)가 ‘내리닫이 살문’(herse) 위를 걷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 모습이 하도 날쌔 보여 이 녀석을 따라가면 성 안을 잘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실제로 이 담비는 관광객을 명소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성내에는 이 담비가 그려진 징이 150개나 산재해있다고 한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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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10>

브르타뉴의 많은 도시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재를 이용해 관광 수입을 거둬들이고 있다. 문화재는 성이나 성당 같은 기념비적인 건축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브르타뉴의 특색 있는 전통 문화를 보여주는 축제나 브르타뉴 특유의 종교 의식 등의 무형문화 유산들도 관광 수익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켈트 음악무용 축제와 ‘파르동’(Pardon: 용서)과 같은 종교 의식을 구경하러 온다.
 
그러나 내가 살고 렌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과거의 대단한 문화 유산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브르타뉴 지방에 비해 지역적 특성을 내보이는 문화 축제도 없는 렌은 관광도시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아 보인다.
 
독특한 브르타뉴 지방의 수도 이야기
 
현재 브르타뉴 지방의 중심지는 렌이다. 그러나 항상 렌이 브르타뉴의 중심지였던 것은 아니다. 옛날부터 브르타뉴는 한 도시에 정치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수도를 만들지 않고 여러 도시들이 돌아가며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이 도시들은 공작령으로서 브르타뉴 남쪽이나 동쪽에 주로 위치해 있었다. 디낭, 낭트, 플로에르멜, 러동, 렌, 비트레, 반느, 게랑드 같은 도시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가운데서 행정과 사법은 봉건적 방식에 따라 반느-낭트-렌의 삼각구도 속에서 이루어졌고, 입법은 거의 모든 브르타뉴 도시에서 담당했다.
 
브르타뉴에 현대적인 의미의 진정한 행정 수도가 탄생한 것은 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199년까지 브르타뉴의 대주교가 머물렀던 ‘돌’(Dol)이 브르타뉴의 수도 역할을 했다. 그 후 여러 도시가 돌아가며 행적적인 정부 역할을 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가장 많이 수도 역할을 담당한 도시는 ‘반느’(Vannes)였다.
 
15세기에 들어 브르타뉴 통치자인 공작이 낭트에 주거를 목적으로 성을 세우면서, 그가 거주한 ‘낭트’(Nantes)가 수도 역할을 하게 된다. 낭트에 대성당이 건립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지금도 낭트에는 그때 세워진 대성당과 공작이 생활했던 성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16세기 브르타뉴가 프랑스에 병합된 이후, 낭트는 렌에게 정치적 우위를 내주게 된다. 그 이유는 렌이 낭트보다 파리에서 가깝기 때문이었다. 중앙 정부와 소통이 더 수월한 지리적인 위치가 오늘날 렌의 위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 뒤 1972년, 낭트가 속해 있는 ‘루와르-아틀랑티크’ 지역은 브르타뉴에서 다른 행정구역으로 분리된다. 하지만 낭트가 행정적으로 브르타뉴에서 분리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브르타뉴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중요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낭트는 브르타뉴의 역사와 문화를 느끼러 오는 관광객으로 넘친다. 이와 반대로 렌은 현재 브르타뉴의 수도라 하지만, 낭트에 비해 변변한 관광거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렌에는 낭트처럼 화려한 공작성은커녕, 조금만 요새성 하나 없고 대성당도 낭트에 있는 것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렌은 다른 방식으로 도시를 특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렌이 선택한 것은 문화예술의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매우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1년 내내 전개되고 있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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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9>

일 년에 한 번, 마을마다 벼룩시장이 열리다
 

▲ 벼룩시장이 열리던 날, 골목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정인진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자 벼룩시장이 열리는 동네가 늘기 시작했다. 겨우내 조용했던 마을의 골목마다 창고 안에 처박혀 있던 해묵은 물건들이 펼쳐지고, 주민들은 음료를 나누며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늦은 봄이나 바캉스가 지난 가을이면, 이곳 브르타뉴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렌에서는 작은 단위의 마을마다 돌아가며 벼룩시장이 열린다. 벼룩시장은 한 해에 한 번, 마을잔치를 대신하는 것 같다. 일 년 중 한 차례 정도, 그것도 매년 비슷한 시기, 일요일에 날이 잡힌다는 건 여기서 일 년을 사니,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론, 벼룩시장이 브르타뉴에서만 열리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벼룩시장이 열린다.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지는 벼룩시장의 장소와 날짜를 알려주는 인터넷 사이트(http://vide-greniers.org)도 있다. 이 사이트에 들어가면, 지역과 날짜, 구체적인 장소를 지도와 함께 검색할 수 있다.
 
이런 벼룩시장이 몇 주 전, 우리 동네 클뢰네에서도 열렸다. 이 동네의 지역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을 거란 기대 때문에 다른 어떤 마을의 벼룩시장보다 관심이 갔다.
 
나는 우리 동네 벼룩시장은 만사 제치고 꼭 나가볼 생각이었다. 울타리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낮은 담장 너머, 늘 감탄하며 바라봤던 꽃들의 주인들이 누군지 볼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라벤더를 흐드러지게 키우는 집의 주인이 궁금했고, 봄마다 마당 가득 수선화가 피어있는 이웃에는 다 누가 사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다른 어떤 동네보다 설레며, 벼룩시장이 열리는 날을 기다렸다. 마침,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벼룩시장이 펼쳐지는 거리는 활기로 넘쳤다.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브르타뉴에서 이 정도라면 충분히 벼룩시장 하기에 좋은 날이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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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8. 브르타뉴의 성곽 도시들2


디낭, 삶과 죽음의 여신의 언덕
북쪽 생말로(Saint-Malo)만으로 열린 넓고 긴 랑스(Rance)강은 강가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생말로에서 배를 타고 랑스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떡갈나무 숲과 새들이 있는 아름다운 강가 마을로 널리 알려진 ‘생쉴리악’의 풍경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그 강 깊숙한 곳에 디낭(Dinan)이 있다.
 

▲ 랑스강을 통해 배를 타고 디낭 항구에 닿을 때, 멀리 계곡사이를 잇는 고가다리가 보인다.     © 정인진


디낭(Dinan)이라는 단어는 켈트어의 ‘언덕’(Dunos)과 ‘삶과 죽음의 여신’(Ahan)이 결합된 단어로, ‘삶과 죽음의 여신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아름다운 이름만큼, 강에서 배를 타고 항구로 들어갈 때나 시외버스로 언덕 위의 고가다리(viaduc)를 통해 들어갈 때나, 언제나 디낭으로 들어설 때는 늘 탄성이 먼저 나온다.
 
성곽 안으로 들어서면 도시는 더 아름답다. 계곡사이를 잇는 고가 다리가 없었을 때는 내륙에서 접근하기조차 힘들었던 곳이 디낭이다. 게다가 높고 튼튼한 돌벽으로 둘러싸인 덕분에 외세로부터 침입이 적어, 오늘날도 여전히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한편, 디낭은 혁명기까지 직물산업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룬다. 오늘날 문화재로 존재하는 시계탑(15세기), 생말로성당(15~19세기), 생소베르성당의 장식들(17~18세기)은 모두 그때 이룬 부로, 상인들이 개인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기계화된 대량생산에 밀려, 브르타뉴의 다른 도시들처럼 디낭의 직물산업도 실패하고 만다.
 
경제적으로 피폐해 있던 디낭이 다시 활기를 찾게 된 것은 1852년, 계곡을 잇는 고가다리와 주변에 신도시들이 건설되면서부터다. 특히 1879년, 성벽 밖에 기차역이 건설되면서 브르타뉴의 발전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또 매년 5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도시가 되었으며, 2년마다 열리는 ‘성벽축제’(Fete des Remparts)는 매우 유명하다. (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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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7>

프랑스에서 ‘시민의 권리와 기회균등’의 정신은 장애인도 시민으로서 사회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해주고, 더 독립적으로 살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가나 사회가 장애인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사회기반 시설을 마련하는 건, 시혜적인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누릴 당연한 권리로 모두 인식하고 있다.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하기 위한 ‘장애수당’
 
프랑스 정부는 장애인들이 장애로 인해 삶이 피폐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책으로 ‘장애수당’(AAH)을 주고 있다. 장애인은 장애정도에 따라 장애수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 장애수당은 적어도 장애가 50%에 달할 때 신청할 수 있다.
 
프랑스 정부는 매달 최고 1인당 759.98유로(한화 약 111만원)를 장애수당으로 지급하고 있다. 이 금액은 직업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금액이며, 수입에 따라 차등 지급된다. 이 수당 외에 장애 정도가 80%이상이거나, 50~79% 사이라도 직업적인 활동을 할 수 없을 때는 ‘추가수당’(CDAPH)이 지급된다. 장애인이 노인이 되었을 때, 일하다가 사고를 당했을 때, 또 시설에서 살지 않고 독립적인 주거공간에서 살 때도 추가수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한편, 프랑스 정부는 장애어린이를 교육시키고 보살피기 위해 필요한 비용도 보상해준다. ‘장애 어린이 교육보조금’(AEEH)이라는 이름의 이 수당은 장애아의 부모에게, 2013년 3월 현재 매달 127.68유로(한화 약 18만원)가 지급된다. 또 상황에 따라서는 ‘보충적인 보조금’(CDAPH)도 제공되고 있다. 그것은 장애어린이의 장애정도와 관련한 비용의 총액에 따라, 부모 중 한 사람이 직업 활동이 줄거나 중단되었을 때, 1~6단계로 나눠서 매달 최하 95.76유로에서 최고 1,060.17유로(한화 약 14만원~156만원)가 추가로 지급된다. (이하 생략)

▲ 프랑스 모든 시내버스 안에 마련된 휠체어전용 공간. 휠체어가 오르내릴 때는 문앞에 발판이 더 나온다.     © 정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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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6>

‘클뢰네 시립도서관’을 소개합니다 
 
교사를 동반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교사가 큰 소리로 동화책을 읽어주는 틈에서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깔깔거리기도 하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지자, 도서관은 다시 평소의 평안함을 되찾았다.
‘휴!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우리 집에서 도보로 약 15분 정도의 거리에 클뢰네 시립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에서는 어린이와 어른들을 위한 도서와 신문, 잡지들을 볼 수 있으며 영화 DVD나 음악 CD까지 구비되어 있다. 내가 집에서 영화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건 바로 이 도서관 덕분이다. 이 도서관에서는 자녀들을 데리고 와 동화책을 빌려가는 부모들도 볼 수 있지만, 잠시 들려 잡지나 신문을 읽는 노인들도 자주 만날 수 있다.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거나 맑거나 상관없이 내가 이곳을 자주 찾을 수 있는 건, 집에서 아주 가깝기 때문이다.
 

▲ 클뢰네 시립 도서관 1층, 청소년들의 모습     © 정인진


옛날부터 나는 도서관에서 ‘노는’ 걸 좋아했다.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지루하면 도서관에 있는 책이나 잡지를 뒤적이기도 하고, 그것도 싫증이 나면 시청각실에서 무료로 상영하는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급기야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센터에서 동양화를 배우기도 했다. 시립 도서관 식당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그저 파 몇 잎과 고춧가루만 들어간 우동이 그 때는 왜 그리 맛있었는지……. 그것을 먹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당시, 이런 시립도서관이 동네 곳곳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시립 도서관을 가기 위해서는 십 여분 버스를 타고,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몇 십분은 걸어야 했다. 도서관은 가볍게 나설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도서관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늘 바랐는데, 그 꿈이 이루어진 건 한국의 지금 집에 살면서부터다.
 
한국의 우리 집 가까이에도 이렇게 시립 도서관이 있다. 요즘은 우리나라도 옛날에 비해 마을마다 도서관이 좀 더 잘 갖추어져 있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이렇게 도서관 가까이 살 수 있는 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아니다. 그래서 더욱 도서관 근처에 살게 된 걸 내 몇 안 되는 행운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곳 브르타뉴에서도 그 꿈이 이루어졌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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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5>

브르타뉴의 집으로 가기 위해, 파리 샤를드골공항(Charles de Gaulle Airport)에서 렌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조금 가다보면 차창 밖으로 빨간 기와집들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런 풍경이 달라지는 건 ‘르망’(Le Ment)을 지나면서다. 르망에 다다르면, 빨간 기와지붕과 아르두와즈(ardoise)라 불리는 검은색 돌판 지붕들이 뒤섞여 나타난다. 그러다 어느 새 온통 검은 돌판 지붕으로 마을 모습이 바뀌면, 브르타뉴 지방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 조금만 가면 집이다. 
 
브르타뉴를 대표하는 '
아르두와즈' 지붕 

▲ 못을 이용해 엮은 아르두와즈 지붕. 지붕의 낡은 버팀목 때문에 돌편을 못으로 어떻게 고정시켰는지 알게 된 건 행운이다. (Vitre에서)     © 정인진

 
이 검은 돌판 지붕만큼 브르타뉴 지방을 잘 표현하는 것이 있을까? 빨간 벽돌집이 북부 프랑스를, 붉은 기와에 아이보리 색으로 벽을 칠한 집들이 남부 프랑스를 대표한다면, 브르타뉴를 대표하는 건 아마도 이 아르두와즈 지붕일 것 같다.

 
아르두와즈는 열과 압력에 의해 형성된 돌로, 편암의 일종이다. 여느 편암처럼 얇게 쪼개지는데다가 육중하고 강한 성질 덕분에 오래 전부터 지붕의 재료로 사용되어 왔다. 아르두와즈를 사각형이나 비늘 모양의 얇은 판으로 쪼개 지붕을 엮는다. 판의 두께는 3~9mm, 또는 20~40mm 로 다양하다. 색깔은 검정색, 회색, 청회색 등 검은 빛을 띠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짙은 붉은 색이나 초록색을 띄는 것도 있다고 한다.
 
지붕을 엮기 위해서는 옛날에는 못으로 고정했고, 19세기 말부터는 갈고리를 이용해 고정시켰다. 이러한 고정방법 때문에 아르두와즈 지붕을 고치기는 쉽지가 않다. 아르두와즈 지붕을 수리하기 위해서는 돌판들을 지탱하고 있는 골조를 함께 바꿔야 한다. 게다가 값도 비싸서 현대에 와서는 옛날보다 덜 사용하는 편이지만, 브르타뉴에서만큼은 여전히 아르두와즈로 지붕을 엮는다. 

▲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아르두와즈 돌편을 만들었다고 한다. 출처: Copain de la Bretagne 중에서 Milan 2001.    

브르타뉴 외에 맨에루와르(Maine-et-Loire), 아르덴느(Ardennes)와 피레네 고산지역에서도 지붕재료로 아르두와즈를 사용한다. 이 지역들은 모두 아르두와즈가 생산되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이들을 포함해, 프랑스 전역에서 아르두와즈가 생산되는 곳은 약 10개 지역이 있는데, 이중 세 지역이 브르타뉴에 있다. 브르타뉴의 네 지역 중, 일에빌렌느를 제외한 모르비앙, 코트다모르, 피니스테르, 이 세 지역에서 모두 아르두와즈가 생산된다.
 
옛날에 아르두와즈 돌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리 사이에 돌을 끼고 정으로 돌판을 쪼갰다고 한다. 과거의 돌판 쪼개는 방법을 보여주는 그림은 브르타뉴를 소개하는 책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이 하도 불편해보여 볼 때마다 얼마나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요즘은 생산과정이 기계화 되어, 과거 부자들의 대저택에나 사용되었던 아르두와즈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건축 재료가 되었다. 그러나 서민들까지 아르두와즈 지붕을 갖게 된 건 오래된 일은 아니다. 메밀대나 늪지의 갈대 같은 건초로 엮었던 서민들 가옥의 지붕이 아르두와즈로 대치되기 시작한 건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오늘날, 브르타뉴에서는 큰 공공건물이나 소규모 개인주택 가릴 것 없이 이 돌판으로 기와를 잇는다. 창고나 우체통 위까지 아르두와즈로 지붕을 얹은 경우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아르두와즈는 건축 재료만이 아니라 손 칠판으로도 폭넓게 사용되어 왔다. 한편 요즘은 접시로도 인기가 많다. 슈퍼마켓에서는 아르두와즈로 만든 접시를 쉽게 구입할 수 있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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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4>

렌의 도심에서는 매주 토요일마다 장이 선다. 프랑스의 어느 지역에서도 시내 한복판에 이렇게 큰 규모의 장이 서는 것은 본 적이 없어서 정말 놀랐다. 프랑스에서 첫 번째로 큰 장이 어디서 열리는지는 모르지만, 렌의 관광안내 책자에 소개된 바로는 이 토요시장이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장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장의 규모와 크기가 엄청나기는 하니, 몇 번째로는 꼽힐 만하겠다.
 
맛있는 유기농음식들이 가득한 렌의 토요시장
 

▲ 렌 시내에서 열리는 토요시장 풍경     © 정인진

 
렌의 토요시장은 규모보다 농업과 목축으로 유명한 브르타뉴답게 먹음직스러운 신선한 채소와 과일, 유제품들이 한가득 쌓여 있다는 게 매력이다. 무엇보다 이 장에는 가까운 주변 마을에서 생산된 싱싱한 농산물로 가득하다. 근처 농장에서 생산된 치즈나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은 물론, 생선들조차 근해에서 잡아 온 것들이다. 또 사과로 유명한 지역답게 이름도 생소한 품종의 다양한 사과들이 광주리마다 매우 싼 값에 판매되고 있다. 또 농장에서 만든 사과주와 사과주스들도 가판대마다 가득 담겨 있다.

 
브르타뉴는 프랑스에서 농업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프랑스에서 품질 높다고 평가되는 고기와 우유, 야채들이 이 지역에서 생산된다. 농업에 기반을 둔 지역인 만큼 옛날에는 가난을 면치 못하고 근근이 살았던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1960년대 농업혁명 이후, 농업 시스템을 근대화하면서 생산력의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다. 특히, 가금류와 돼지의 집중적인 사육은 브르타뉴를 프랑스에서 첫 번째 농업지역으로 만들어 놓았다. 돼지고기는 프랑스에서 55%가 생산되고 있고, 가금류의 45%, 우유의 25%가 이 지역에서 제공된다. 그러나 이런 집중적인 가축사육은 물을 심각하게 오염시켰고 화학비료의 지나친 사용으로 토양도 심하게 오염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브르타뉴에서는 몇 년 전부터 자연농업을 지향하는 농부들에 의해 유기농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추세이다. 옛날 방식으로 초원에서 가축을 사육하거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야채를 키우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유기농산물을 원하는 소비자들이 점점 늘면서 유기농업은 더욱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런 만큼, 렌의 토요시장에서는 유기농산물을 파는 상인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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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3. 브르타뉴의 성곽 도시들1

날은 흐렸지만, 오랜만에 비가 그쳤다. 며칠 째 계속되던 비가 그치자, 어디든 훌쩍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고 간단하게 가방을 챙겼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마음이 일 때 나설 수 있을 만큼, 렌 근처에는 볼만한 유적지들이 많다.
 
특히, 프랑스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동쪽, 일에빌렌느(Ille-et-vilaine)지역에는 옛날 프랑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워졌던 요새형태의 성들이 많다. 그런 만큼 이곳들은 참혹한 전투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브르타뉴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현장이었던 ‘푸제흐’(Fougeres)성을 가볼 생각이다.
 
변방의 참혹한 전투현장, 푸제흐성
 

▲ 푸제흐 성은 복원된 탑들과 폐허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정인진


렌에서 북서쪽으로, 시외버스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푸제흐라는 도시가 있다. 푸제흐는 맨느(Maine)와 노르망디(Normandie)지역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브르타뉴의 대표적인 변방지역 중 한 곳이다. 푸제흐가 속해 있는 곳은 예로부터 ‘막슈 드 브르타뉴’(les Marches de Bretagne: 브르타뉴의 변방들)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수세기 동안 프랑스와 브르타뉴의 국경이 계속 옮겨지면서 치열한 전투들이 벌어진 곳이다.
 
변방에 속하는 도시로는 푸제흐 외에도 비트레, 라 게흐슈-드-브르타뉴, 샤토브리앙, 앙스니, 클리쏭, 마슈쿨, 게랑드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푸제흐는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어, 과거 프랑스군은 물론 백년 전쟁 동안에는 영국군과도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구름이 낮게 드리워진 흐린 날씨였지만, 길을 걷기는 상쾌했다. 도시 바로 입구에 그 유명한 푸제흐 성이 있고, 버스정류장도 성을 뜻하는 ‘샤또’(chateau)역이다. 나는 더 가지 않고 그 곳에서 내렸다. 지도에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푸제흐 성은 깎아지른 듯한 산들로 둘려쳐져 있는 ‘낭송’(Nancon)계곡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계곡과 같은 이름의 낭송강의 작은 물줄기가 계곡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성은 계곡 한가운데 불쑥 솟아있는 붉은 빛 화강암 바위 위에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성 문앞으로는 낭송강의 깊은 물길이 마치 폭포처럼 성 안을 쩌렁쩌렁 울리며 흐르고 있었다.
 
성 안으로 들어서자, 높고 수려한 여러 채의 탑들과 무너진 건물들의 폐허가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옛날에 무너진 걸 20세기에 복원시켰다는 성 안의 탑들도 감탄스러웠지만, 군데군데 다시 만들지 않고 허물어진 상태 그대로인 건축물들의 폐허는 더욱 인상적이다. 푸제흐성은 무너진 탑들 일부는 복원이 되었고 또 몇몇은 허물어진 채 존재하는데, 이런 모습도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뭐든 완벽하고 깔끔하게 예전 모습 그래도 만들어 놓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이런 폐허들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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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2>
▲ 차들의 진입이 금지된 렌 시청앞 광장 모습     © 정인진


변덕스러운 프랑스의 날씨, 배낭은 ‘필수품’

 
볕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밖으로 나오니 제법 쌀쌀했다. 점퍼깃을 채우고, 혹시 나 하면서 챙긴 면스카프를 가방에서 꺼내 목에 둘둘 마니 훨씬 적당하다. 여전히 그늘을 지날 때는 좀 춥다는 느낌이다.
 
프랑스에서 오래 살아보았지만, 여전히 날씨에는 적응이 안된다. 브르타뉴도 예외는 아니어서 얇은 스웨터나 스카프 같은 걸 챙겨 다니며, 입다가 다시 벗기를 반복하며 산다. 그래서 여기서는 늘 배낭에 비옷이나 스카프, 스웨터 같은 것들을 챙겨 다닌다.
 
물론, 이 배낭은 뭔가 챙겨 나올 때만 쓰는 것은 아니다. 입고 나온 점퍼나 스카프 같은 걸 풀러 놓을 때도 꼭 필요하다. 아침에 쌀쌀했다고 해서 낮에도 같은 날씨는 아니다. 다시 볕이 나서 엄청 더워지기도 하고, 또 언제 먹구름이 몰려와 비를 뿌릴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옷을 입었다 벗었다,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며 다녀야 한다.
 
이렇게 준비를 했다면, 걸어다니는 건 문제가 아니다. 오늘은 내가 살고 있는 도시, 렌 (Rennes)을 탐방할 계획이다. 렌에는 약 20km씩, 남북으로 나뉘어 도시를 산책할 수 있는 둘레길이 마련되어 있다. 오늘은 그중 북쪽 둘레길을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평소에도 볼일을 보러 시내를 갈 때 주로 걷는 편이니, 이런 둘레길 걷는 걸 놓칠 수는 없다. 지난 달에는 남쪽 둘레길을 걸었고, 오늘은 그 북쪽에 있는 길을 걸어볼 생각이다. 이렇게 걷기 좋은 복장으로 차려입고 지도까지 들고 길을 나서니, 마치 관광객이 된 기분이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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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1>

▲ 브르타뉴 지도 * 출처: Chrystel Courtin 그림, pascal Coatarlem, Bretagne, cap sur le grand large (De la martiniere Jeunesse, 2001) 중에서     © Chrystel Courtin

 프랑스 북서쪽에 위치한 반도, 브르타뉴

 
나는 작년부터 하던 일을 멈추고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갖고 있다. 이건 순전히 재충전과 변화를 모색하기 위함인데, 프랑스를 선택한 것은 옛날 유학생활을 했던 곳이라 익숙한 점이 많아서였다.
 
또 프랑스 중에서도 브르타뉴 (Bretagne)지방을 선택한 것은 이곳이 프랑스의 어느 곳보다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프랑스에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지역의 자연과 문화를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이곳에 살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특색 있는 점이 많다는 데 놀라고 있다.
 
프랑스 북서쪽에 위치한 브르타뉴지방은 대서양을 향해, 서쪽으로 길게 뻗은 반도 모양을 하고 있다. 바다가 삼면에 위치해 있어서 수산자원이 풍부하고 어업이 발달한 모습이 우리와 닮아 친숙한 모습이다. 
 
브르타뉴 지방의 맨 서쪽은 ‘피니스테르’(Finistere), 중앙의 위쪽은 ‘코트다르모르’(Cotes-d’Armor), 아래쪽은 ‘모르비앙’(Morbihan), 그리고 맨 동쪽은 ‘일에빌렌느’(Ille-et-Vilaine), 이렇게 네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옛날에는 루아르-아틀랑띠끄(Loire-Atlantique)지역까지 브르타뉴에 속해 있었으나, 1957년 루아르-아틀랑띠크가 브르타뉴지역에서 다른 행정지역으로 분리되면서 현재의 네 지역으로 형성되었다.
 
이렇게 네 지역으로 나눠진 브르타뉴는 가운데를 중심으로 크게 동서로 구분 짓는데, 서쪽을 바스-브르타뉴(Basse-Bretagne), 동쪽을 오트-브르타뉴(Haute-Brertagne)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서쪽 지역의 바스-브르타뉴를 ‘남부(Sud) 브르타뉴’, 오트-브르타뉴를 ‘북부(Nord) 브르타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동서로 위치한 지역을 남과 북으로 부르는 건 참 신기하다. (이하 생략)

 

계속해서 <일다> 지면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6355&section=sc7&section2=%BF%A9%C7%E0


Posted by 고마리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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