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2020. 8. 18. 15:40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 에코페미니즘에 기초한 삶 살아내기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시금치, 2016)]는 제목 때문에 손에 쥔 책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저자가 쓴 책이 아니라 여성환경연대에서 기획한 것으로 3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15명의 필자가 참여했다.

필자의 직업을 살펴보면 환경단체나 여성단체의 활동가, 농부, 교수, 연구자, 직장인 등으로 그 직업도 다채롭다.  

전체 4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장은 생명, 2장은 연대, 3장은 모성, 4장은 살림으로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기대했던 바는 덜 소비하는 삶의 구체적인 실천적 모습이었다. 하지만 에코페미니즘의 이론적인 내용이 적지 않아 기대한 바에는 못미쳐 아쉬웠다

 

1장의 '에코페미니즘과 생명돌봄의 의미(세월호 사건을 중심으로)'란 제목의 글은 강남순이 쓴 것인데, 이 필자는 기독교인이라 종교인으로서의 한계는 있지만  기독교인으로서는 나름 괜찮은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들을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으로 생각해왔다.

필자는 이 글 속에서 '생명돌봄'을 '생명이 생명 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다양한 삶의 조건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무엇보다 '생명의 위계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생명돌봄'에 대한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 동물, 식물의 생명에 대한 위계적 생각, 인간 생명 내에서도 성별, 인종, 국적, 언어, 피부색, 성적 성향, 육체적 정신적 능력, 나이에 따른 위계주의를 비판한다. 그리고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한 국가 내에서도 생명에 대한 위계주의를 확인한다. 필자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생명의 위계주의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성찰할 시간을 제공한다. 

 

1장의 두 번째글. 김현미의 '소비에서 자급으로 좌표이동: 도시 에코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는 글의 서두가 내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도시에서 에코페미니스트로 사는 것이 가능할까? 도시에서 나고 자라고 계속 도시에서 살아온 나는 에코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도시인의 삶을 사유해보고자 한다." 저자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을 닮았다. 나는 도시에서 자고 자라 계속해서 도시에서 살고 있는 철저한 도시인이 내가 과연 친환경적인 생태적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내내 해왔었다. 그래서 이 글에 거는 기대가 컸다. 필자는 "도시에서 에코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자기돌봄을 통해 결국 지속가능한 삶이라는 '공동의 책무'를 함께 지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친구와 동지를 만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그의 질문은 지속가능한 삶을 함께 꾸려가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자에게 도시인은 소비하기 위해 일을 하는 자다. 윤리적 소비를 한다고 해도 부족함이 있다고 본다. "도시 여성들은 결국 파괴적 소비자와 착한 소비자 사이를 모호하게 횡단하며 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필자는 에코페미니스트의 문순홍의 생각을 가져온다. 착취당하는 타율노동의 시간을 최소화하고 창조적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소득감소에 불구하고 스스로 선택한 자율노동과 생존에 필요한 일상적 노동, 즉 요리, 청소, 동식물 돌보기 등과 같은 자활노동에 참여하라는 것. 필자는 "도시에서 에코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사는 바로 이곳을 '생태도시'로 상상하고 현실화하는 것"이고 "결국 자족적 순환경제를 위한 자원을 자연 속에서 복구해가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실현하는 것", "도시를 생활 정치의 현장으로 바꾸어내는 것"이라고 보충한다. 교수인 김현미가 '도시에서 에코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새로울 것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런 생각에 기초해서 김현미 자신이 어떤 일상, 어떤 구체적 삶을 살고 있는지를 얘기해주었으면 더 좋았겠다. 추상적이고 뻔한 이야기로 그치고 마는, 교수인 김현미의 한계가 아쉽다. 

 

1장의 마지막 글 '좋은 삶을 위한 돌봄과 노동'에서 이안소영은 "아무도 돌보지 않으려는 시대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고민하고자 한다. '아무도 돌보지 않으려는 시대'라는 표현이 마음 깊이 와닿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은 자연이 '공짜'로 준 선물들이다. 물, 공기, 흙, 인간의 몸과 정신을 살찌우는 곡식들과 갖가지 채소와 과일 같은 것들 말이다." 필자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에 대한 폄하, 돈으로 사고 팔지 않는 노동에 대한 폄하를 들여다 본다. 전업주부, 실업청년, 노인, 자원활동가, 예술가, 자급소작농이 하는 일은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을 생산하는 진짜 노동이 아닌 것으로 무시된다는 것. "비록 상품을 생산하지 않더라도 직접 돌보는(살려내는)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전제로 노동을 재배치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더라도 꼭 필요한 노동에 대한 재평가로부터 출발해보자는 필자는 이야기는 중요하다.

 

2장의 첫번째 글 '스물 네 계절의 제주를 살다: 비혼여성 1인 가구의 제주 귀농표류기'는 여성농부의 체험적 글이라서 무척 흥미로왔다. 무엇보다 젊은 패기의 무모한 도전이랄 수 있는 제주도에서 농부로 살기가 점차적으로 현실적인 감각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진정성을 본다. 자가용을 구입하고 세탁기, 미니 컴포넌트, 인터넷 설치, 온수사용, 전기장판, 화목난로 등 6년만에 차곡차곡 살림이 쌓여가는 과정은 필자가 마침내 농부로 산다는 것이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을 위한 일임을 깨달아가는 과정이었다 싶다.  마침내 원하는 대로 짓는 자아실현형 농사와 돈벌이로 짓는 생계형 농사의 비율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몸으로 살아낸 내공이 나에게도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필자의 이야기에 힘이 실리는 기분이다. 필자가 언제까지 농부로 살아갈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수 년간 자신의 시간과 노력, 땀을 바친 농사일이 필자의 이후 삶에도 비옥한 거름이 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2장 두번째 글 나영의 '밀양과 '할매들'과 나'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밀양의 그 시커먼 밤하늘을 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도시에서 살아온 내 일상이 빙하 위의 북극곰만이 아니라 밀양 주민들의 눈물 위에서 존재했음을 깨달았다." 도시인들이 핵발전소에 의존해 과도한 전기를 소비하는 일은 알건 모르건 죄악이라 생각한다. 도시인의 전기를 대기 위해 누군가는, 밀양의 할매들처럼 자신의 땅을 빼앗기고 피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모르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핵발전소와 송전탑을 생각하면 항상 속이 상한다.

 

2장의 세번째 글, 연구자 김신효정의 '씨앗 페미니즘'을 읽으면 시골 할머니들이 지켜온 토종씨앗 이야기가 정말 감동적이었다. 

"토종씨앗으로 농사를 지어온 여성 농민의 삶에서 힘겨운 과제 중 하나는 이듬해 농사에 쓸 씨앗을 잘 거두는 것이었다. 농부아사침궐종자, '농부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는 뜻의 옛말이 있을 정도로 씨앗은 귀하게 다루어졌다. 씨앗은 농사의 시작이자 다음 해 농사를 위해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고, 그 농사는 가족과 공동체의 생존수단이었다. 따라서 오랜 세월에 걸쳐 기후와 땅에 맞게 선별되어 전해진 토종씨앗에는 여성 농민들의 지식과 기술, 삶이 알알이 담겨 있는 셈이다. 이처럼 씨앗은 여성 농민의 어머니에서 딸에게로, 시어머니에서 며느리에게로, 이웃에서 이웃으로 전해 내려왔다." 씨앗까지 이윤의 도구로 삼는 거대기업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은 토종씨앗밖에 없는 것 같다. 씨앗을 지켜온 여성 농민에 대해 얼마나 감사해야 할지...

 

 

3장 첫번째 글 여성학자 이경아의 '모성의 힘으로 세상을 다시 짜기 위하여'에는 '모성이데올로기'를 들여다 본다. 

"수많은 사회에서 모성 이데올로기는 여성에게 억압적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자녀의 안녕을 위해 건강, 쾌락, 야망과 같은 어머니의 욕구를 필요이상으로 과도하게 희생하라고 요구한다. 아이의 이해와 어머니의 이해를 대립하는 것으로 구성해놓고 그 두 가지 이해를 대립시키는 사회적 배치에는 눈을 감은 채, 아이의 이해를 위해 어머니의 이해를 희생시키는 것을 자연의 질서라고 강요하는 것이 모성 이데올로기의 핵심이다." 필자는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적 본질주의는 여성의 능력을 출산능력으로만 축소시키고 그것이 본성의 전부인 양 위장하는 관점이라고 정의한다. 여성들의 몸에서 인간의 차원, 영혼의 차원을 약탈하는 식민주의라는 것이다." 필자가 이야기하듯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한다. 단지 임신과 출산만이 아니라 폐경 후 여성을 보면 여성의 몸이 얼마나 남성과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다. 출산하는 능력에만 가두지 않고 남녀 생물학적 차이를 주목하는 일은 중요해 보인다. 하지만 그 차이가 차별의 근거로, 또 여성의 역할을 축소하는 데 이용된다면 심각한 문제다. 에코페미니즘이 주장하는 모성 이데올로기 비판은 의미있다.  그럼에도 에코페미니즘은 '모성' 개념을 놓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굳이 '모성' 개념을 고집하지 않더라도 돌봄과 배려에 대한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다. 오히려 '모성' 개념은 여성편향적인 개념이라 남성을 소외시킬 뿐만 아니라 출산할 수 없는 여성이나 출산할 의지가 없는 여성까지 소외시킨다. 

 

3장 두번째 글은  '마을에서 산다는 것: 마을공동체운동의 현재와 미래'는 여성환경연대 공동대표인 장이정수에 의해 쓰여진 글이다. 마을 공동체 운동을 해나가면서 그 운동과 관련한 구체적인 과제들을 거론하는 대목이 무척 진솔하게 와닿았다. 중산층 가족중심의 운동이 되어 한부모가정, 장애인, 미혼모, 비혼자, 성소수자 등이 배제되는 운동이 되어온 점, 전통적인 성역할을 고정시키기 쉽다는 점, 청년들에게는 전망 없는 사업이 되어온 점, 이동이 빈번한 대도시에서 마을공동체운동의 한계, 행정주도의 마을공동체운동의 한계, 지원사업 중심의 마을공동체 운동의 지속불가능성 등. 

 

3장 세번째 글, '안전한 먹거리에서 탈핵사회로'는 지속적으로 탈핵운동에 참여해온 김혜정의 글이다. 이 글을 읽다 보니 80년대 중반의 '반전반핵' 구호가 떠올랐다. 탈핵운동은 평화운동으로 80년대에는 운동의 중심부에 들지 못했다. 필자도 이 운동을 접고 싶었으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필자의 운동 인생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고 그 사고는 일반대중에게 핵발전소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이기적으로 시작해서 이타적으로 변했다"는 사람들.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시작한 것이 모든 아이를 지키고 우리 사회를 지키는 탈핵운동으로 발전해가는 일반 시민의 각성과정이 감동적이다. 밀양할매들도 핵발전소에 대해 관심 없고 송전탑 반대투쟁을 벌여왔지만 급기야 "송전선을 따라가다 보니 핵발전소가 있더라"는 깨닫게 된다. "밀양 송전탑 사업은 신고리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를 대도시로 공급하기 위해 76만 5000볼트의 초고압 송전선과 161기 송전탑을 건설하는 사업이다." 

2015년 6월 "한국에서 핵발전소가 가동된 지 37년, 탈핵운동 27년 만에 고리1호기 폐쇄결정을 이끌어냈다. 탈핵운동은 그만큼 오랜 시간과 끈기를 요구한다." 탈핵운동을 위해 헌신하는 필자에게 격려와 박수를 보내고 싶다. 

 

4장 첫번째 글, 마르쉐친구들 이보은의 '행복을 교환하는 시장:농부와 요리사, 수공예가들의 마르쉐@'에서 도시공간에 대한 대안적 상상력을 발견할 수 있다. "도심 공원이 일시적으로 거대 시장으로 변해 시민들에게 생활과 학습, 문화와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 여전히 이런저런 문제가 많다고 고백한다. 부딪치면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일 아닐까 싶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에서 도심에 시장판을 벌이기는 어려우니 2020년에는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같다. 

 

4장 두번째 글 '삶을 지속하게 하는 예술, 남도 살림문화'은 가배울 대표인 여성학자 김정희가 썼다. 작년에 북토크가 열려 가배울에 가본 적 있다. 그때 김정희씨를 만났다. 기분 탓이었는지 지쳐보였다. 2010년에 가배울을 시작했다고 하니 10년째에 접어드는 시간이었다. 과연 여전히 잘 꾸려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건 그렇고 이 글에서 말하는 전문적 예술과 소비하는 대중의 이분법에 대한 문제제기, 의미있다. 그래서 필자는 살림예술을 이야기한다. "살림예술은 그 지역의 흙, 햇빛, 기타 자연적 요소, 그리고 오랜 문화 전통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수백 년 이상 발전해온 예술이다." "살림예술은 삶의 예술이기도 하다. 예술은 생존에 기여하는 문화이며, 자연과 이웃들과 소통하며 살고 싶은 예술가의 생존 욕구, 삶의 욕구를 의미한다." "살림예술의 미적 기준은 고도의 전문성이 아니라 소통과 일치에 있다." 예로 강강수월래를 들고 있다. 대학 축제때 강강수월래를 해 본 적 있다. 그때 생각을 하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손에 손을 잡고 줄줄이 뛰어다니다가 줄이 뒤엉켜 나아가지 못해 끙끙대기도 했던 그 즐거웠던 기억. 그런데 강강수월래와 닮은 춤이 서양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브르타뉴에 갔을 때 알았다. 이들 역시 손에 손을 잡고 집단무를 췄다. 용기가 없어 그 틈에 끼여서 춤을 추진 못했지만 함께 춤을 췄다면 좋았을 걸, 하고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마지막 글 이대 철학과 교수 이상화의 '에코페미니즘을 삶의 철학으로!"에서 여성주의자들이 전지구적 연대로서 쟁취해낸 것이 '공정무역'이라고 한다. 처음 알았다. 한살림의 경우, 공정무역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공정무역'이 긍정적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공정무역' 커피를 구매하는 것이 생산자를 덜 착취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사실 내 경우, 에코페미니즘은 9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에코페미니즘을 연구하던 고마리생각터 동료인 정인진씨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정인진씨는 에코페미니즘을 실천적 이론으로 평가한다. 실제 행동으로 사회 속에서 힘을 발휘하지 않는 한 이론으로서는 공허하다는 것이다.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의 15편 글을 읽는 동안 에코페미니즘적 구체적 실천에 대한 이야기들이 좀더 있었으면 좋지 않았겠나 싶었다. 그럼에도 충분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고민해볼 이야기들이고 삶의 방향성을 잡아나가는 데 있어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