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2020. 9. 7. 17:26

[불안의 사회학], 누구나 불안하다

한줄 느낌: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다

 

하인츠 부데(Heinz Bude)의 작은 책 [불안의 사회학(동녁, 2015)]은 현대 독일인의 불안감의 원인을 찾아본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불안감은 독일인만의 불안이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 사회 속에서도 같은 불안을 발견할 수 있다.

불안감은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는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이다. 나만 해도 마음 속 깊숙이 불안감이 올라올 때가 있다. 다양한 불안감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거대 시스템이 개인을 조여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은 숨이 가파올 만큼 강력하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죽음이라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또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런 저런 통증에 시달리다 보니 어쩌면 의료 권력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면 불안하다. 코로나 19가 창궐하는 지금은 혹시라도 바이러스에 전염되서 후유증으로 고생할까 불안하다. 태풍 하이선이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예고된 지역 사람들은 자기 삶터가 훼손될까 불안할 것이다. 한 친구는 가난한 독거노인이 될까봐 불안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갑자기 떠오르는데, 철학 워크샵 중에 참가자 한 사람이 싱크홀에 대한 불안감을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난다. 

나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나름의 불안감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불안하다'라는 1장의 제목이 마음에 확 와닿는다. 불안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저자는 상류층도 중산층도 사회적 약자도 모두 불안하다고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불안을 들여다보면서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한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대단한 내용을 기대하면 안 된다. 저자의 불안에 대한 분석은 새로울 것도 없지만 불안의 해답 역시 특별할 것도 없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불안을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긴 하다. 

 

노트, 이어지는 생각>

1장 누구나 불안하다 >

잘못된 선택을 할 경우가 너무 많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또는 대학을 잘못 선택할 수도 있고, 전공을 잘못 선택할 수 있으며, 외국에 체류한 게 잘못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인간관계를 제대로 선택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반려자와 사는 장소도 잘못 선택했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모든 선택으로 말미암아 매번 경쟁에서 사람들이 걸러지게 되며, 이때 많은 사람들이 통과하지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낙오한다. 이런 과정은 삶 속에서 일찌감치 시작되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90년대 이후의 독일 젊은이들의 이야기지만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리라. 다수의 젊은이는 이런 저런 이유로 성공할 기회가 거의 없는 시대를 살아간다. 따라서 살아가는 일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불안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태에서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온 생애의 매 순간 자신의 전반적인 삶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우리는 우회로를 갈 수 있고, 휴식을 취할 수도 있으며, 중요한 일을 미룰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이런 것들은 의미가 있어야 하고 인생의 목적을 완성하는 데 기여를 해야만 한다. 그저 아무 할 일 없는 상태가 주는 불안은 참아내기 힘들다. 불안은 어떤 국가나 사회도 해결해줄 수 없는 의식상의 긴장을 유발한다.

자기 삶을 주도하고 있다는 느낌은 살아가는 데 중요하다. 내가 내 삶을 스스로 꾸릴 수 없다 싶을 때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리스먼은 내부지향성과 외부지향성을 구분함으로써, 오늘날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례적으로 타인을 수용하고 추종하는 자세"를 지녔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이런 자세 뒤에는 방어적이고 반발하는 기질이 숨어 있다. 외부지향적인 성격은 또래 집단들의 판단에 흔들리고, 최신 유행과 대세에 영합하며, 의심이 들 경우에 부딪치고 저항하기보다 입을 다무는 편이다. 게다가 고독하고 지친 순간에 다른 사람들의 욕구와 바람 때문에 정작 자신은 억눌려 있으며, 노예가 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런 상태가 바로 사회학에서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부르는 감정이 자라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런 상상이 바로 사회적 불안의 원천이 된다. 개인을 부담스럽게 만들고 망가뜨리는 것은 객관적인 상태가 아니라, 눈에 띄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내가 모자란다는 느낌이다. 외부지향적인 성격의 경우에 타인과 터무니없이 비교하거나 비상식적인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해주는 내면적인 장치가 부족하다. 그런 장치가 없어 고삐 풀린 시기심 뒤에는 심각한 불안이 숨어 있다.

오늘날의 "고독한 군중"들 속에서 불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누군가 자신을 후견해주길 바라며 소외당한다고 느끼는 '침묵하는 다수'는 어떻게 형성되는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사회적 발전 과정 속에 처해 있다고 보는지, 어떤 지점에서 완전히 혼자 남겨졌다고 느끼는지, 자아는 어떻게 자연스럽게 불안을 견딜 수 있는지, 어떤 담론과 의식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통의 불안을 나누며 의사소통할 수 있는지 말이다. 불안이 드러나는 양상을 보면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2장 깨지지 않는 관계에 대한 갈망>

현대사회에서 맺어지는 거의 모든 사회적 관계란 언젠가는 서로 헤어질 조건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순간적으로 깨닫는 사람은 큰 비애를 느낀다. 

오늘날 깨지지 않을 수 있는 관계를 보장하는 유일한 도피처가 남아 있다. 바로 부모와 자식 관계이고, 형제자매  사이의 관계이다.

(...) 사람은 끈끈한 관계 없이는 잘 살 수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유대 관계는 우리를 불안에 빠뜨릴 수밖에 없는데, 나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깨어지지 않는 관계를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존재의 나약함에서 비롯하는 것이라서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관계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한 것일 수도 있다.  

 

4장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갈 때>

사람들이 지닌 "찬탈자 콤플렉스"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승자가 되었을 때 그에 대한 증오심을 두드러지게 내보이게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최고의 부류에 속하지 못하더라도 별 다른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별 볼   없다고 여겼던 존재들이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걸 보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낙오자들은 격분하게 된다. 

찬탈자 콤플렉스는 시기심의 다른 이름으로 보여진다. 시기심, 질투는 무서운 감정이다. 그래서 '질투의 눈을 조심하라'는 충고는 깊이 새겨두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질투심은 대단하게 성공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소한 것도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5장 추락을 염려하는 중산층>

레오 톨스토이나 존 러스킨이 그랬던 것처럼 자발적 가난과 한적한 곳에서의 칩거 생활이 신경과민에 걸린 사람들과 지나치게 안전에 연연하는 사람들이 가진 그런 불안을 갖지 않도록 막아준다는 생각은 구원을 받고자 하는 '소박한 삶'의 환상에 속한다. 이런 환상은 중산층으로부터 나왔으며 빈곤층과는 무관하다.

자발적 가난과 칩거생활의 소박한 삶은 중산층의 환상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옳다. 가난한 사람은 이미 가난하기에 가난을 원치 않는다. 가난의 미덕을 이야기한 호라티우스의 경우도 아주 부유하지 않은 부자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렇다.  결국 중산층의 추락에 대한 불안이 소박한 삶으로 이끈다는 것, 맞는 말 같다. 

혼자서 창업을 하여 관문을 헤쳐 나가려는 사람은 쉽게 손해를 본다.

이런 사람들(최저임금 이하를 버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미용사, 가판대 주인과 싸구려 술집 주인뿐만 아니라 변호사, 건축가, 예술가, 번역가와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강의하는 시간강사들도 있다. 그들의 현재 수입으로 질병이나 노후를 대비한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여기에 바로 중산층의 충격, 그러니까 '열등하다고 평가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집중되어 있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어느 정도의 부를 보장했던 직업도 지금 더는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일을 하고 경험을 쌓음으로써 기존에 없던 것에 도전하는 용기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지만, 반대로 친구들이나 다른 지인들의 눈에 자기 목표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실패자로 보일 수 있다.

중산층이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방향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여유도 있고 탄탄한 자격증도 있는 개인이 오늘날 안전망도 없으며 언제라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느끼는 까닭은  자립하려는 노력과 공동체적 연대감 사이의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다양한 층위로 구성된 중산층의 불확실한 미래를 보듬어주거나 그들 간의 불평등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본보기가 되는 사회윤리적 환경이 없다.

중산층의 교육에 대한 집착에서 드러나는 불안은, 사회적 지위를 잃을지 모른다는 잠재적 두려움의 표현이다.

불현듯 한 친구가 떠오른다. 자녀교육에 과도한 욕심을 부리는 친구의 모습이 대리만족이라고 생각했지만 중산층의 사회적 지위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다른 중산층의 자녀 교육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계층상승에 대한 욕구의 표현으로 보이긴 했다. 하지만 이들의 행위는 내가 보이기에 제자리에서 달려야만 나가 떨어지지 않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오늘날 중산층의 자녀들은 부모들의 교육집착 덕분에 부모들과 비슷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거나, 아니면 그보다 못한 지위로 떨어질 수도 있다. 

 

6장 사회적 약자들은 일상이 투쟁이다>

오늘날 독일 저소득층은 생산직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주로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전체 노동자들 가운데 15퍼센트가 건물 청소나 택배 배달을 하고 보안회사, 음식점, 미용실, 싸구려 가게에서 일하거나 간병인으로 일한다. 이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급여는 적지만 해야 할 것이 많다. (...) 단순 서비스업에 종사해도 생계유지는 하지만, 여가 시간을 희생하면서 힘들게 일했던 것을 보상받을 정도의 소득은 올리지 못한다.(...)

서비스업 종사 노동자들은 젊고 튼튼한 동료들을 보며 단단히 대비를 해야겠다고 느끼고, 나이가 들고 기력이 쇠약해지면 불안해진다.

이런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들의 신체는 택배, 청소, 간병, 서빙과 판매같은 노동을 10년 이상 해내지 못한다. (...) 과거 '생산직 노동자'들과 비교할 때 오늘날의 새로운 '서비스업 노동자'들의 특징은 여성의 비율이 높고,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업무를 하기 위한 자격이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일이 없거나 너무 일을 해야 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이라영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독일의 경우, 과로에 시달리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저소득층은 여성이거나 이민자라는 이중적인 약자다. 만약 가난한 노동자가 이민여성이라면 삼중적인 약자가 된다. 약자의 위치가 더해질수록 사회 속에서 이들의 자리는 더더욱 취약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택배나 청소일을 하는 노동자 중 이민자는 보기어렵지만 노인이나 여성과 같은 사회약자는 쉽게 만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언젠가 이민자가 단순 서비스일을 담당할지 모르겠다. 

모두가 알고 있듯 이제는 불법 노동자가 없이는 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우리 사회에서도 저임금의 불법 노동자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단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른바 새로운 의미의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고려해보면 그들이 품게 되는 불안은 대체로 이런 형태이다. 중간급 관리자에 맞서거나 젊은 신참과 노련한 베테랑들 사이에서 버티면서 계속 일할 수 있을지, 어떻게 휴식시간을 만들어내고 굴종하지 않을 수 있을지, 중년에 일터에서 해고될 때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아야 할지, 어떻게 피곤해도 견뎌낼 수 있을지. 

(...)그들(할인매장 노동자, 미용사, 경비)이 하는 이런 일은 노동자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는 경우도 드물고 성과를 내도 만족감을 주기 어렵다.

 

7장 나약한 자아>

사람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문제는 자신의 현실적 한계를 넘어서 더 많은 것을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부과되는 다양하고 모순적인 요구와 가대로 인해 과도한 부담을 느끼는 데 있다. 

자아는 자기 스스로의 표상이지만 오로지 타인을 경유해서만 자신을 인지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은 사실은 감정이입에 능한 이들에게는 아주 당연하다. 따라서 내 주변 사람들은 내 자아의 근거일 뿐 아니라 내 가능성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계활동뿐 아니라 가정에 충실하고 여가 역시 잘 누려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여가생활을 잘 즐겨야 한다는 압박감은 주변에서 쉽게 발견되는 것 같다. 지칠 정도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 일과 여가생활의 피로. 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보인다.

사회는 어디에서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고 개인을 부추기지만, 불현듯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바라는 삶의 형태를 지향하는 데 참조할 만한 본보기나 시나리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삶은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인 것 같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리자면, 저마다의 삶에서 중요한 결정은 살다보면 뒤늦게 깨닫게 된다. 어쩌면 스스로 긍정하고 부정하며 결정해야 하는 위험을 비켜나가고 싶어 하는 데에, 삶을 소홀히 한 진짜 원인이 있지 않을까. 망설이고 꾸물거리는 태도가 현명하고 인간적일 수 있음에도,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안은 우리 시대의 불안이다.

 

8장 아무도 제어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네트워크 사용이 일반화된 지금을 본다면 통제 사회의 전형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니까 구금과 격리를 통해 감시하고 훈육했던 전통적인 사회가 아닐, 끊임없는 개방성과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그런 통제사회말이다. 모든 것이 커뮤니케이션이며 그 누구도 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터넷과 CCTV로 대변될 수 있는 개방적 통제. 우리 사회의 얼굴이다. 

 

9장 불안의 정치>

자신이 얻은 사회적 지위를 물려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혹은 모아둔 저축 예금과 개인연금 보험조차 쓸어갈지도 모르는 통화붕쾨에 대한 불안은 떨쳐버리기 힘들다. 

근본적인 문제는, 불안을 두고 얘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불안을 체험하게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느낌과 함께 혼자 남겨지게 된다.

불안을 소통함으로써 불안을 공유하고 불안이 개인을 묶어준다는 것. 

 

11장 불안을 다스린다는 것>

전후 세대가 떨어질 바닥은 전쟁이 아니라 전쟁과는 다른 근원적 이유로 불안을 일으키는 거짓된 평화일 것이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웃음을 불안을 딛고 이겨낸 승리로 간주했다. 그들은 웃음을 성당이나 교회에서 연출되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불안, 즉 신과 관계된 불안이나 자연의 힘이 야기하는 대참사에 대한 불안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억압하며 숨막히게 하는 도덕적 불안을 극복하고 이겨낸 것으로 받아들였다. 

존 케이지의 단조로운 음악, 이브 클랭의 파란 색, 머스 커닝햄의 순순하게 우연히 만들어내는 몸동작, 그리고 찰스 임스와 레이 임스가 만든 집 케이스 스터디 하우스는 그처럼 무로 도약함으로써 불안을 해체하는 불교적 사례에 속한다

타인이 없으면 자아도 없고, 애매함이 없으면 정체성도 없으며 절망이 없으면 희망도 없고 끝이 없으면 시작도 없다. 그 사이에 불안이 있다.

불안은 행복, 영광, 명예와 같은, 삶에서 거짓된 것들의 실체를 드러낸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불안 없이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불안하다는 것은 삶의 조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죽을 운명인 우리 존재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니까. 불안이 우리를 완전히 집어삼켜 살아갈 수 없게 만들 정도가 아니라면 불안은 우리 삶에서 우리에게 행동하게 하는 동인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