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2020. 9. 10. 18:20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변화 속에서 영원으로 확장되는 순간으로 안내

한줄 감상: 어중간해서 지루하다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이라는 제목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키운 것 같다. 그런데 기대감이 커서인지 기대에 못미치는 책이라서 좀 아쉬웠다. 이 책은 나탈리 크납에 의해 쓰여졌는데 소개글을 보니 독일의 '임상철학자'라고 되어 있었다. '임상철학자'?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책을 다 읽고 든 생각은 한글번역서의 제목이 원제와 다르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원제를 살펴보니 'Der unendliche Augenblick'이다. 영원한 순간, 무한한 순간... 아무튼 그런 의미다. 원래 제목이 더 시적이고 아름답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이자 매력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번역서들은 원래 제목을 잃고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때로는 얼토당토않은 제목이 붙기도 한다.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이라 제목이 내용과 동떨어진 제목은 아니지만 원제에 미치지 못하는 제목이다. 

 

이 책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변신, 2부는 시련, 3부는 흐름이라고 되어 있다. 1부는 자연, 2부는 인생, 3부는 사회, 세상과의 관련된다고 보면 된다. 저자는 변화의 충격이 큰 시기인 과도기를 직면하는 지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지혜를 자연으로부터 얻는데, 과도기를 창조적인 순간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과도기에 직면하게 될 때마다 변화를 수용하고 생명의 힘과 사랑으로 헤쳐 나가며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 책의 가장 아름답고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무한한 순간, 영원한 순간으로 확장되는 '영원의 틈새' 체험이다. 이 체험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의 경험이다. 다시 한 번 더 이 책의 제목이 바뀐 것이 아쉽다. 

 

노트-이어지는 생각>

요즘 지혜로운 사람들은 현대의 복잡한 문제 앞에서 자연을 거스르는 대신 자연과 더불어 일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 방법이 영리하고 지속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1부 변신>

희망을 품는 것이 합당한 일이다. 이것이 봄의 메시지다.(1. 봄의 메시지 중에서)

과도기에 우리를 받쳐주는 바닥은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딛는 걸음과 더불어 생겨난다. 미지의 세계로 내딛는 우리의 발걸음이 그것을 자라게 한다. 과도기에 우리는 경험을 토대로 미래를 계획할 수 없다. 현재의 순간과 그 가능성 말고는 다른 것에 의존할 수 없다.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하는 모든 경험이 우리에게 새로운 토대가 되어준다.(1. 봄의 메시지 중에서)

과도기는 현재진행중에 기대야 한다는 이야기로 읽힌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기댈 수 없고 그냥 현재를 살아갈 밖이라는 의미. 글쎄... 어떤 시기라도 그것이 과도기이건 아니건 과거와 현재는 끊어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재적 관점의 과거를 풀어내는 일은 미래적 희망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작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예전의 법칙이 통하지 않고 새로운 법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다시금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경험에 가까워진다. 이런 존재의 순간, 삶은 새로와진다.(1. 봄의 메시지 중에서)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 '어린시절의 경험'에 가까워진다는 이야기, 앞의 이야기와 모순되지 않나? 마치 현재만이 해답인 듯 이야기하다가 다시 과거 순간을 거론한다. 

 

2부 시련>

인간은 복합적인 존재다. 물론 생물학적 소질을 지닌 채 태어났지만, 후천적인 경험과 행동이 우리의 두뇌와 신체와 정신을 형성한다. 주변 사람들, 주변 환경, 우리가 이용하는 여러 기술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문화적으로 규정된 형태 뒤에 '야인'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돌아갈 '본래적 자연'은 없다. (3. 탄생이라는 모험 중에서)

절대 공감. 인간은 생물학적이면서도 문화적인 존재다. 자연과 문화, 타고난 것과 후천적인 것의 구분이란 지극히 개념적이고 언어적인, 편리를 위한 구분 이상은 아니다. 그래서 자연적이니까 좋고,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니까 나쁘다는 식의 논쟁은 한심하다. 그 누구도 자연과 문화를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변화가 가져오는 창조적 긴장의 장은 결코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고, 사회적인 특성을 띠는 것이다. (4장 인생의 막간, 사춘기 중에서)

고인이 된 사랑하는 이를 다시 삶으로 데려와 미래로 함께 나아갈 수 있으려면 애도하는 자는 초조하게 뒤돌아보지 말고, 사랑하는 이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과 동행하고 있음을 신뢰해야 한다.(5 애도의 시간 중에서)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아 지하세계로 가서 아내를 되찾지만 뒤돌아보지 않기로 한 조건을 지키지 않아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 신화를 통해 가까운 사람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를 생각해 보게 한 이 대목은 흥미롭다. 더는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은 이가 내 곁에 함께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결국 앞으로는 죽은 이가 내 기억 속에서 함께 함을 받아들여야 함을 뜻한다. 

모든 이별은 애도과정을 동반한다. (5 애도의 시간 중에서)

그래서 죽음뿐만 아니라 관계, 직장, 공간 등의 변화도 모두 상실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모든 변화 앞에서 우리는 주춤한다. 하지만 변화를 수용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기본적으로 인생의 진행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음을, 인생을 자기 뜻대로 꾸려갈 수 없음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많은 가능성을 인식하게 된다. (5 애도의 시간 중에서)

요나스 요나손이 쓴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이 점을 유쾌하게 잘 이야기해준다. 노인은 어린 시절은 어머니로부터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지혜를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산다. 내 마음에 들건, 아니건, 내가 아무리 아둥바둥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내 삶이 내 마음대로 펼쳐지는 것이 아님은 살아가는 우리들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안다면 통제하느라 지나친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시각이 단선적인 시간에서 다차원적인 체험의 시간으로 확장하면 아주 짧은 시간도 무한을 담을 수 있다.(6 삶을 위한 죽음 중에서)

저자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제목도 영원한 순간, 무한한 순간으로 정했던 것 같다. 이 책의 매혹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본다. 순간에 무한을 담는 지혜.  

"삶의 의미는 다른 생명과 소중한 것을 나누는 데 있습니다. 한 마디 말, 생각, 따뜻한 손길 또는 따뜻한 시선! 음악이 가슴에 와닿거나 강아지가 촐싹거리며 꼬리를 흔드는 것이 미소를 자아내는 한, 살아 있을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자비네 렌츠의 말, 6 삶을 위한 죽음 중에서)

삶이 살 만한 것이 되는 것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순간들은 물리적 시간으로는 짧을 수 있지만 체험하는 동안 확장될 뿐만 아니라 이후 기억으로, 무의식으로 남아 영원처럼 긴 시간으로 남는다.

신뢰와 희망은 자신감을 안고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짝을 이루는 힘들이다. 이 두 가지 능력은 삶에서 아주 중요하고 중심적인 기능을 한다. 신뢰와 희마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 두 가지가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현재 순간을 두려움 없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7 생의 안전벨트 중에서)

저자는 '기본 신뢰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뢰나 희망 모두 과거의 경험에 뿌리를 박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걷어내는 현재의 힘이다. 현재순간은 과거로 미래로 이어져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저자가 말하는 무한한 순간이 될 수 있다. 

삶의 예측불가능성은 바라던 미래가 도래하는 것이 정말로 있을 법하지 않을 때조차도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품고 행동할 수 있게 한다.(7 생의 안전벨트 중에서) 

그래서 삶이 예측불가능해서 좋다. 그래서 삶이 불안하듯 해도 자유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저마다 각자의 신체 안에 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 구조적인 고독을 빚어낸다. 그리고 이런 고독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동경하게 만든다.(7 생의 안전벨트 중에서)

"불변하는 것은 정체성과 계속해서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반면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계속 흐른다. 나는 계속해서 죽고 동시에 계속해서 다시 태어난다."(7 생의 안전벨트 중에서)

나란 존재가 한 시도 멈춰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삶 자체가 변화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삶을 충분히 향유하기 어렵다. 

영원의 틈새는 유한성 앞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얻는 것이다.(8 정신적 면역력 중에서)

아름다운 글귀다.

 

3부 흐름>

바다는 전통적으로 정신을 상징한다. 바다를 건너는 사람은 스스로를 알게 된다.(9. 사회적 위기 중에서)

그렇구나... 

인류는 매일매일 세계 전역에서 똑같은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전지구적인 모노컬처를 만들어가기로 결정한 것이 틀림없다.(10.세계의 끝에서)

우리나라의 도시들을 방문하다 보면 중심가가 모두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좌절하게 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도 그런 경험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프랑스 브르타뉴가 신선하게 다가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주어진 과제를 그냥 빨리빨리 처리해버리는 '해결모드'에 있을 때 나를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 삶의 시간을 잃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감각을 차단해버린다. 반면 산책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에로틱한 만남을 갖는 등등, 우리가 어떤 일에 온전히 몰두해서 '지금 여기'를 강하게 지각하느라 나를 별로 느끼지 못할 때는 당장은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을지 몰라도-자기 지각과 더불어 시간감각이 사라지기 때문에- 사실은 그런 몰입을 통해 우리의 지각의 틀이 확장된다.(12 무한한 순간 중에서)

명상 속에서 완전히 몰두할 때야 말로 확장의 경험이 가능하다. 이때는 진정한 평화의 순간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은 열린 체계다.늘 스스로에게서 자극을 내보낼 뿐 아니라 외부에서 자극을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스스로 변화시켜나간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다. 감정적으로, 생각으로, 신체적으로 말이다. 이런 사실 그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토대로 무엇을 만들어내는가다.(12 무한한 순간 중에서)

사회적인 과도기에도 우리는 변화의 다섯 가지 힘을 신뢰할 수 있다. 자연의 힘에 대한 신뢰, 달갑지 않은 변화에 대한 전적인 수용, 함께 성장해나갈 수 있는 상호적인 형태의 사랑, 우리가 늘 새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생명력, 무엇보다 미래에서 현재를 이끌어내는 능력으로서의 희망.(13. 순환 중에서)

저자가 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그대로 담겨 있는 구절이다. 신뢰와 희망, 수용, 사랑, 생명력. 

 

시적이라서 아주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논리적인 아주 딱딱함도 아니고 아주 개인적이거나 구체적이지도 않고 아주 일반적이거나 추상적이지도 않고... 어중간하다. 무엇보다 읽었던 책을 장황하게 요약한 부분은 지루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좋았던 책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효과가 있으니 반드시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지나치다. 장황하게 요약하지 않더라도 독자들이 원하면 알아서 그 책을 찾아볼 수 있으니까. 뿐만 아니라 읽었던 책, 저자들을 과도하게 인용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세상에 새로운 생각은 없으니까 내 생각이라는 것도 모두 앞선 자들의 것이겠지만, 내가 완전히 소화시켜 또는 미처 소화할 틈도 없이 내 것이 되어 자연스러워 부드럽게 술술 펼쳐지는 책이 좋다는 개인적 취향도 있겠지만...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이 책이 재미있지도 않았다고 고백한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어디선가 들은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차라리 자기 삶의 구체적인 이야기로서 풀어나갔다면 훨씬 진지하면서도 흥미로와 읽기 즐거운 책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좀더 깊은 사색으로 치밀하게 풀어나갔더라도 좋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어중간하다. 철학책이라기보다는 자기계발서 같은 인상을 받았다.

 

사족1> 저자가 장황하게 소개한 미하일 엔데의 [모모]는 내가 특별히 소장하고 있는 책들 가운데 하나다. 엄청 지루한 책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 책을 꼭 품고 살아가는 데는 시간을 아끼고 관리하느라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기 위함이다.

사족2> 저자는 '에어비앤비'를 비판하면서 '에어비앤비'를 통해 자신의 집을 내놓는 친구를 놓고 적은 돈을 벌기 위해 여가시간을 빼앗기고 삶을 팔아치운다고 한탄한다. 글쎄... 그 적은 돈이 에어비앤비로 집을 내놓는는 사람에게는 생계에 꼭 필요할 수도 있을테고... 적어도 에어비앤비로 여행을 다녀온 나로서는 저자에게 동의하기 어렵다. 에어비앤비가 없었더라면 적은 돈으로 그처럼 편안한 숙소를 이용해 여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야말로 세상의 변화에 부적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